작은숲:Sudo위키/자연과학사
“과학적 사고의 목표는 특수한 것에서 일반적인 것을 보고, 일시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을 보는 것이다.”
“미래로 가는 노정의 갈림길에서 모든 진보적인 정신은 맹목적으로 과거를 지키려는 수많은 사람들과 대립하게 된다.”
이 문서는 서양을 중심으로 한 자연과학사 (自然科學史) 를 다루고 있습니다.
고대 문명과 자연철학의 탄생
자연과학의 역사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는 고대 문명, 그 중에서도 특히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문명에서 있었던 신화나 주술적인 사상들 속에 과학의 원형이 있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고대에는 과학이라는 개념의 적립과 과학적 방법론의 체계화가 없었지만 단편적인 과학 지식들이 그러한 초자연적인 사상과 혼재하였던 것입니다.
BC 5000 ~ 3000년 경, 나일 강 유역의 이집트와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바빌로니아를 중심으로 도시가 출현하면서 여러 분야에 걸친 문화적 발전이 있었습니다. 정치 조직과 사회적 계급의 탄생, 종교의 발달과 신전 건설, 선박과 차륜의 발명 등을 통해 역사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서 BC 4000 ~ 400년 경까지 지속되었는데, 이집트 문명과는 다르게 여러 민족의 흥망의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은 도시국가의 형태로 있었는데 아카드의 사르곤 1세가 여러 도시국가들을 합병하여 제국을 이루었으며 이후 바빌로니아 왕조가 뒤를 이었습니다. 바빌로니아 왕조의 전성기에는 함무라비 법전으로 유명한 함무라비 왕이 메소포타미아를 통치했으며, 이후에는 군사국가인 아시리아가 메소포타미아를 통치했습니다. 이후 아시리아는 카르데아 인들에게 정복되면서 카르데아 제국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국가들은 일반적으로 전제국가였고, 문화적으로는 무명 문화 (無明 文化) 라는 특색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명 문화는 많은 문화적 유산의 작자를 알 수 없는 문화를 뜻합니다.
천문학과 점성술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는 농업과 가장 밀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계절의 변화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으며, 천문 관측에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관측 대상은 주로 달, 태양,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의 7가지 행성이었습니다. 신관들은 신전에서 천체를 관측하며 이들 각 행성이 그 배후에 있는 항성에 대해 독자적인 주기를 가지고 운동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이 행성들이 천구의 어느 일정한 띠 속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발견하여 이것을 큰 원으로 생각했으며, 이 원을 12가지로 등분한 것을 궁 (宮) 이라고 불렀습니다.
천문 관측과 함께 점성술이 발전하였는데,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지리적으로 침략당하기 쉬운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항상 불안한 분위기에 휩싸였었던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불안감에 대한 극복을 위해 자신의 운명을 예측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었으며, 자신의 운명이 천체들의 운행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 역시 함께 있었습니다. 대우주인 하늘과 천체들의 운행이 소우주인 지상과 인간의 운행을 지배한다는 생각을 통해 점성술이 처음으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바빌로니아와 중국에서 공통적으로 퍼졌는데, 국가의 성쇠나 군주의 운명, 전쟁, 기아, 자연재해 등이 천체의 운행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기에 당시의 전제군주들은 지속적인 통치를 위해 천체를 관측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점성술은 점차 변질되면서 정치적 차원이 아닌 개인적 차원으로 변하게 되었고, 현대 사회에도 사주팔자나 별자리 운세 같은 것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점성술의 발전이 확실히 천문학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으나 국가의 운명을 예측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천체에 대한 집요한 관측―덕분에 천문학 발전에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천문학 지식은 달력이나 점성술을 위해 축적되었던 것이기에 주기성 계산 같이 단순하고 산술적인 측면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현존하는 유물의 대부분은 단순히 행성들의 위치를 기록한 수표 정도이며 천구의 운동에 관한 이론이나 기하학적 접근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수학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전된 경제에서 직물이나 곡물의 양, 보석의 가치를 다룬 수학 문헌들이 존재하는데, 이는 특이하게도 10진법과 60진법이 혼합된 기수법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왜 굳이 60진법을 함께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답은 없으나 여러 민족의 도량형을 통일하기 위해 약수가 많은 60이라는 수를 단위로 선택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현대에 사용되는 시간이나 각도에 대한 60진법 표기는 이것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현존하는 수학 문헌의 대부분은 바빌로니아 시대에 남겨진 것으로, 계산표나 문제를 기록한 것이 많은데 이는 계산을 위해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현대의 초등 대수학과 사실상 동일한 문제들인데, 4칙 연산이나 급수, 자승근의 근삿값, 평면도형의 면적, 입체도형의 부피 등을 구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대영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점토판을 통해 메소포타미아 인들이 2차 방정식과 몇몇 특수한 3차 방정식을 풀 수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기하학적인 증명은 아니었으나 피타고라스 정리[1]를 알고 있었던 것을 유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이집트 문명에 비해 수학 계산과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뛰어났지만 실용적인 측면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기에 수학적 증명, 정리 등에 대한 연구는 전혀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의학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는 질병이 악령의 저주나 저지른 죄의 대가로서 생기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의사들은 구토제나 설사약, 속이 뒤집히게 만드는 약을 통해 환자에게서 악령을 몰아내어 치료하려고 했습니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합리적인 방식으로 병을 치료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이 동물의 간 등을 이용하여 점을 치는 등의 주술적인 치료법이었습니다.
이집트 문명
이집트 문명은 나일 강 유역에서 시작되었는데, 강 연안에 두 국가로 분리되어 있던 것이 메네스 왕에 의해 통일되면서 제1왕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집트의 지배자인 파라오는 신의 후손이자 신적인 존재로서 절대적인 권력을 가졌으며, 그를 보좌하는 신관과 관료들이 있었습니다. 이집트의 부는 주로 관개 농업에 의존하였으며, 상업 활동이나 무역은 파라오의 엄격한 통제 하에 있었습니다. 문화적으로는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마찬가지로 종교적이고 주술적이며 무명 문화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현재 이집트의 역사 자료를 통해 이름을 알 수 있는 사람은 모두 파라오와 소수의 상류 계급에 해당하는 사람들인데, 이를 통해 거의 모든 문화적 활동이 파라오와 종교를 위해서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의학
직업의 분화가 시작되었던 초기의 이집트 의사는 대부분이 신관이었으며, 신전에서 종교적이고 주술적인 방식으로 환자를 치료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고대 문명들과 비교하면 무엇보다 경험적이고 합리적인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현재에는 8가지 정도의 의학 문헌이 전해지는데, 가장 오래된 것은 제12왕조 시대의 카훈 파피루스 (Kahun papyrus) 이고, 가장 유명한 것은 BC 16세기 경의 에버스 파피루스 (Ebers papyrus) 와 BC 17세기 경의 에드윈 스미스 파피루스 (Edwin Smith Papyrus) 입니다. 카훈 파피루스는 BC 1950년 경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주된 내용은 산부인과와 수의학 분야에 대한 것입니다. 수의학이 다루어진 이유는 이집트 문명이 농경 중심의 사회였기 때문에 가축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재산이었고, 그로 인해 수의학 분야가 중요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카훈 파피루스의 내용 중 몇 가지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주술적인 치료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에버스 파피루스는 약 20m 정도의 길이인데, 여러 가지 질병들의 증상에 관련한 877가지의 치료법이 적혀 있습니다. 치료법 중에 주술적인 것은 2가지에 지나지 않지만 알 수 없는 병명이나 약재가 많기에 일종의 의학전서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에드윈 스미스 파피루스는 5m 정도의 길이로 상당히 짧은 편인데, 외과에 관련된 48가지의 임상 치료 사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외과적인 상해의 원인은 다른 분야보다 명백하기 때문에 주술적인 요소를 배제할 수 있었고, 이 때문에 다른 문헌들에 비해 합리적인 치료 방식이었습니다. 이 파피루스에는 모든 질병에 대한 이름과 증상, 진단, 치료법이 각각 기술되어 있고 특히 상처에 관해서는 완전히 치료할 수 있는 것, 치료가 가능한 것, 치료할 수 없는 것이라는 3가지의 진단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마찬가지로 이집트 문명의 의술에서도 질병의 원인으로 악령의 침투라는 병마론적 시각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외부에서 직접 관찰할 수 없는 내과 분야의 질병에서 이러한 경향이 더 심하며 치료법의 대부분이 악령을 몰아내는 주술이었습니다. 그러나 관찰하기 쉬운 눈병, 피부병, 외상 등에 대한 기술은 정확한 편이며, 특히 외과 분야에 있어서는 발굴된 사람의 뼈를 통해 골절에 대해 뼈를 맞추거나 부목을 사용하는 치료법을 시행했던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수학
이집트의 수학에 대한 자료는 많지 않으며 현존하는 것 역시 대부분 길이가 짧은 편입니다. 그 중에서 린드 파피루스와 고레이체프 파피루스가 비교적 완전하게 남아 있습니다. 린드 파피루스는 BC 7세기 경의 힉소스 시대의 것으로, 실제로는 BC 19세기 경에 처음 필사되었습니다. 실용적인 수학을 가르치기 위한 교재이며, 87가지의 예제를 통해 산수, 기하학 등에 대한 계산 능력을 키우는 것이 주요 목적입니다. 처음부터 34번까지의 예제들은 분수표, 기수를 10으로 나눈 표 등을 통해 계산 자체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그 이후로는 해법을 붙인 응용 문제들이 이어지는데, 빵을 분배하는 방법, 곡물 창고의 부피를 구하는 방법, 경작지의 면적을 재는 방법, 피라미드의 높이와 경사를 계산하는 방법, 귀금속의 무게를 재는 방법, 동물 기름의 사용량을 재는 방법, 빵이나 맥주를 만들 때 소맥분의 비율을 계산하는 방법 등이 있습니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비례, 급수, 1차 방정식, 원주율, 기초적인 삼각법 등이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원의 면적을 계산하는 것에 있어 정사각형을 사용하였는데, 한 변의 길이를 원의 지름의 으로 계산한 것이 특징입니다. 또한 이집트의 기수법에서는 0이라는 기호나 자릿수라는 개념이 없었기에 각각의 단위마다 수의 기호를 정해서 사용했으며, 이 기호들은 9회까지 반복됩니다. 분수의 경우에는 와 을 제외하면 모두 단위분수 ( 꼴) 의 덧셈으로 표기하였습니다.
이집트 수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부분은 바로 기하학의 발달입니다. 나일 강의 주기적인 범람으로 인해 경작지가 수몰되어 경계가 모호해지기 때문에 이에 대해 토지 소유자들 사이에 분쟁이 많았습니다. 경계를 다시 복원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측량 기술이 필요하였고, 이에 따라 자연히 기하학이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공학
이집트 문명이 남긴 건축물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피라미드일 것입니다. 피라미드는 왕의 묘소로 사용되었으며, 현존하는 피라미드 중 가장 거대한 것은 기자에 있는 쿠푸 왕의 피라미드인데, 제일 아래에 있는 층의 가로와 세로 길이가 약 230m이고 높이는 약 146m이며 기울기는 51도 50분입니다. 네 모서리는 동서남북의 4방위와 일치하고 있으며, 화강암으로 평균 2.5톤의 돌 250만 개 정도를 쌓아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산됩니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이 피라미드를 건설하기 위해 10만 명 정도의 노동자가 1년에 3개월 간격으로 교대하였고 다 지어지는 데에 20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피라미드의 건축에 관해서는 전해지는 문헌이 없기 때문에 어떤 방법을 사용하여 이런 거대한 구조물을 만들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추측만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 이외에 BC 3500년 경에 바퀴가 발명되었으며, 돛단배를 만들기도 하였고, 해시계나 물시계 등도 고안되었습니다. 이집트 사회에서는 기술자의 사회적 지위가 신관 계급의 다음일 정도로 높았습니다.
고대 그리스와 자연철학
그리스 지역은 산지가 많고 평지가 적기 때문에 농경에 적합하지 않았기에 인구의 증가에 따라 그리스인들은 해외로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욕, 모험심 등으로 이어졌으며 해외에 식민지를 개척하고 그곳에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토지를 소유하던 지배계층이 쇠약해졌고, 상업이나 무역에 종사하던 상공업 계층이 큰 성장을 이루면서 두터운 중산층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렇게 식민지에서 출현한 새로운 상공업 계층은 기존의 전통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었고, 무엇보다 많은 생각들을 할 수 있을 만한 경제적 풍족함을 가지고 있었기에 과학과 철학 역시 태동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산이 많은 그리스의 지형 때문에 인구 10만 이하의 여러 폴리스들이 산재하였기에 민주정치에 알맞은 정치적 단위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또한, 폴리스라는 형식 덕분에 독창적인 문화를 이룰 수 있었고, 스파르타 같이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폴리스의 시민들은 개성을 자유롭게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도시들에는 광장 겸 시장으로 사용되는 아고라 (Agora) 라는 공간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사회 생활이나 상거래, 정치활동, 제사 등의 여러 가지 일들에 관한 토론이 자유롭게 진행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개인적인 주체성과 논리적 사고, 다양한 수사법 등이 발전했습니다. 그리스 문명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등의 문명에서 다양한 창조 신화, 우주관, 자연관, 제사 방식, 일상 생활 등을 흡수하며 그러한 이질성 속에서 하나를 신중하게 선택하여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느 것이 사실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지 판단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근원적인 접근을 통해 여러 가지 사상의 공통점을 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밀레토스 학파
BC 7세기 경부터 그리스인들은 자연 현상이 어떤 원인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우주의 근원과 운행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을 도모하였습니다. 이러한 생각에 대한 해답이 처음으로 제시되었던 곳은 이오니아 지방에 있는 소아시아 연안의 밀레토스였습니다. 이 도시에서는 흔히 밀레토스 학파라고 불리는 세 명의 자연철학자가 활동하였습니다.
밀레토스 학파의 탈레스 (Θαλής) 는 바빌로니아와 이집트를 여행하면서 동방의 지식들을 흡수하여 학문의 기초로 삼았고, 만물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대지는 원판 모양으로 생겼고 그 위와 아래에 물이 있으며, 비는 대지 위에 있는 물이 떨어지는 현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물이 흩어지면 안개와 구름이 되며, 물이 뭉치면 얼음과 바위가 된다고 하였고, 물을 생명의 근원으로 인식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물이 원초적인 혼돈 상태라는 신화를 지닌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나 이집트 문명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는 일식을 예언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 이전에 이미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일식을 예언한 기록이 존재합니다. 탈레스가 예언한 일식은 BC 585년 5월 28일에 있었는데, 이는 역사상 처음으로 정확한 날짜가 기록된 일식이었습니다.
탈레스는 자연에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들을 사변적이고 논리적인 추론을 통해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방법은 아직 불완전한 상태였으나 여기에서 새로운 분야들이 탄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유의 과정에 있어 실험, 정량적인 계산, 관찰 등이 경시되었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말하는 자연과학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무엇보다도 초자연적인 것을 통해 자연을 설명하는 방법에서 벗어났다는 점을 보면 자연과학의 근원적 발상을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낙시만드로스 (Ἀναξίμανδρος) 는 우주의 원질에 관해 훨씬 진보적인 생각을 했습니다. 신의 힘으로 우주가 생성된 것이 아니라 물질 그 자체의 운동에 의한 것이며, 태초의 원질은 가시적인 형태가 아니라 지각할 수 없는 추상적인 물질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이 물질은 불생불멸의 것이며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소용돌이에 의해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이 생겨서 그 둘은 각각 소용돌이의 주변과 중심으로 모여 지구를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천둥은 바람 때문에 생기며, 번개는 구름이 둘로 갈라지면서 생긴다고 설명하였고, 여러 가지 원소의 상호 전환과 생성은 침해와 보복의 과정이며, 그것이 바로 변화의 원리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중에서 변화의 원리는 복수가 횡행하는 인간사회를 통해 유추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아낙시메네스 (Αναξιμένης) 는 우주 만물의 원질이 공기라고 주장하였는데, 공기가 희박해지거나 농축되는 것을 통해 모든 자연현상을 설명하였습니다. 자연을 구성하는 여러 원소 사이의 차이는 원질의 양과 농축도에 따라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공기가 농축되어 물이 되고, 물이 농축되어 얼음을 형성하며, 공기는 물이 증발할 때에 희박해지면서 생기고, 공기가 희박해지면 불이 됩니다. 즉, 물질의 변화는 가역적인 과정이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자연에 대한 근원적인 설명을 시도한 것입니다.
원자론
고대 그리스에서는 자연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을 위해 원자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설명하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설명인 원자론에 따르면 원자는 불연속적인 입자로, 우주를 이루고 있는 물질들의 기본 단위이자 원질입니다. 원자론은 주로 데모크리토스 (Δημόκριτος) 와 레우키포스 (Λεύκιππος) 에 의해 제기되었는데, 특히 데모크리토스는 모든 물질 뿐만 아니라 신이나 악마와 같은 초월적 존재들도 원자로 구성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원자들은 기하학적인 모양을 가지고 있으며, 크기와 모양, 무게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낙하 운동 시에 속도가 다른 원자들끼리 충돌하여 소용돌이 운동을 일으킨다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그는 존재하지 않는 것도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존재한다는 주장을 했는데, 이는 원자가 운동하기 위한 장소에 대한 고려로 탄생한 개념입니다. 그 외에도 무한한 수의 원자들은 무한한 진공 속에서 아무런 목적 없이 운동하며, 이러한 운동은 영원한 것이기에 여러 사물들의 성질은 원자 운동 형태에서의 차이 때문에 생긴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따르면 모든 변화는 원자들이 새롭게 배열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데모크리토스와 레우키포스의 원자론은 모든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원자가 오직 한 종류라고 생각했던 것에 반해, 원자가 여러 종류라고 생각하는 다원론이 탄생했습니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영향을 받았던 철학자 엠페도클레스 (Ἐμπεδοκλῆς) 는 모든 물질이 불, 물, 공기, 흙이라는 4가지의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4원소설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이 4가지의 원소를 분리하거나 결합시키는 것을 '사랑'과 '미움'이라고 설명하였는데, 서로 사랑하는 원소들은 결합하지만 미워하는 원소들은 분리된다는 내용이 그것입니다. 4가지 원소가 완전하게 결합하면 구형을 이루기 때문에 구분할 수 없으나, 점차 미워하는 힘이 강해지면 네 가지로 완전히 나누어지고, 사랑하는 힘이 강해지면 본래의 완전한 상태로 돌아갑니다. 우주에서는 이처럼 4가지 원소의 분리와 결합이 반복되며, 이는 4가지 원소 자체의 동력인에서 유래합니다. 또한, 우주에 있는 다양한 종류의 물질들은 4가지 원소의 결합 비율의 차이 때문에 그렇게 다양한 성질들을 가집니다. 예컨대 뼈의 경우에는 불, 물, 흙이 각각 4 : 2 : 2의 비율로 결합하여 생겼다는 것입니다. 물론 엠페도클레스의 이러한 주장은 합리적인 실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사변적인 생각과 직관을 통해 일반적인 원리를 유도한 것입니다. 이 주장은 이후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추가되면서 많은 지지를 받았고, 연금술의 탄생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고대의 원자론은 본질적으로 정량적이고 실험 위주의 연구나 수학적 추론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변적인 논의에 따른 추론이었기 때문에 현대적 의미의 과학 이론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후 원자론은 19세기에 화학자 존 돌튼에 의해 확인되면서 근대적인 과학 이론으로서 다시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근대의 원자론에 비하면 사변적이고 다소 몽상적이기까지 한 고대의 원자론은 목적론이나 신에 의존한 설명을 배제하고, 운동이 우연적으로 일어나지 않으며 필연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기계적 세계관을 처음으로 내세웠다는 점에 있어 큰 의의를 가집니다.
히포크라테스 의학
초기 그리스 의학은 주술적이고 종교적인 경향이 있었으나 자연철학의 발생과 더불어 의학 분야에서도 합리적인 사고를 중시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히포크라테스 (Ἱπποκράτης) 에 의해 의학 분야의 혁신이 있었는데, 그는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각지를 돌아다니며 의술 활동을 하면서 질병 치료에 대한 경험을 쌓았습니다. 이후 코스 섬에 최초의 의학교를 설립하였고, 이곳을 중심으로 코스 학파가 형성되었습니다.
히포크라테스의 저술인 『Corpus Hippocraticum』 (히포크라테스 전집) 은 그리스 의학에서 가장 중요한 문헌으로 여겨지는데, 총 87권으로 의학의 여러 영역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이 방대한 내용을 히포크라테스가 전부 썼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간혹 서로 모순되는 설명도 있기 때문에 여러 사람에 의해 집필된 것이 확실합니다.
어쨌거나 히포크라테스 의학은 밀레토스 학파의 자연철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의학을 이론적인 과학이 아닌 기술 정도로 취급했습니다. 또한 미신에 의존하지 않고 여러 가지 사변적인 생각이나 가설 등을 거부한 것도 특징입니다.
플라톤
밀레토스 학파를 시초로 해서 많은 발전을 거듭한 그리스의 자연철학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기존의 여러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며 경험에 입각한 자신의 독자적이고 일관적인 이론을 구축하였습니다.
우선 플라톤 (Πλάτων) 을 먼저 살펴보자면, 그의 사상은 종교적 전통에 가까운 자연관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초자연적 존재가 우선 존재하여 그것이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여 현재와 같이 되었다는 믿음이 그것입니다. 또, 그는 세상을 보이는 세계와 본질적인 세계로 구분하였습니다. 본질적인 세계에 있는 것들은 영원히 존재하며 변하지 않으며, 보이는 세계는 본질적인 세계의 그림자와도 같다는 것이 그의 사상입니다.
플라톤은 엠페도클레스와 유사하게, 모든 물질들은 물, 불, 흙, 공기의 4가지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특히 기하학을 중시했던 그는 이 원소들이 정다면체로 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2] 그의 이러한 자연철학 이론의 특성은 무엇보다도 4원소를 입체도형으로 생각했다는 점과 원소들이 변환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정다면체들은 궁극적으로 삼각형으로 분해될 수 있으며, 이러한 방식을 통해 새로운 형태로 변환될 수 있다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우주론적인 측면에서 플라톤은 우주가 완전한 구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자체의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축에 지구가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구의 주위를 도는 각각의 천구들의 반지름에 수학적인 조화가 있으며, 이러한 발상은 르네상스 시대의 요하네스 케플러 등의 자연철학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밑에서 수학하였으며, 이후 학문을 집대성한 아리스토텔레스 (Ἀριστοτέλης) 는 마케도니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명의를 배출하였으며, 그의 아버지 역시 마케도니아 국왕 아민토스 2세의 시의로 일했습니다. 그가 아직 어렸을 때 아버지가 사망하였고, 그는 친척 집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이후 17세에 전문적인 교육을 받기 위해 아테네로 와서 플라톤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플라톤의 제자 중에서 가장 뛰어났으며, 플라톤은 그에 대해 "다른 제자들에게는 박차가 필요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제동을 위한 고삐가 필요하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플라톤의 사망 이후 그는 플라톤의 아카데미를 떠나 당시 14세였던 마케도니아 왕자의 가정교사가 되었습니다. 이 왕자는 나중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졌으며, 스승 아리스토텔레스를 위해 많은 후원을 해주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가 성장하자 그는 아테네로 돌아와서 뤼케이온 (Lykeion) 이라는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제자들을 데리고 학교 내의 정원을 거닐며 대화 식으로 강의를 하였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소요학파 (逍遙學派) 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뤼케이온은 도서관, 박물관, 동물원 등의 부속 시설을 갖추고 있었는데, 이들 설비에 대한 자금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원으로 조달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젊은 나이에 갑자기 사망하자 뤼케이온은 위태로워졌으며, 그는 아테네의 고등법원에 의해 사형 판결을 받았다가 탈출하여 망명 생활을 하던 중에 장티푸스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다양한 학문을 연구하였으며 자신의 논리에 입각하여 상당한 수준의 지식 체계를 세웠습니다. 그의 학문은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 있으며 동일한 기초 위에서 상호적인 연관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의 학문은 세계의 영속성, 육체와 함께 영혼이 사멸한다는 주장 등과 같이 기독교의 교리와 일치하지 않는 부분을 포함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에 2000년 가량 서양의 학문 체계를 지배할 수 있었습니다.[3]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은 크게 물리과학과 생물학으로 나뉩니다. 여기에서 물리과학은 물질 이론, 운동 이론, 우주론으로 세분화되며 긴밀한 연관성을 가집니다.
물질 이론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질 이론에서는 엠페도클레스가 제안했던 4원소설을 수용하여 세계가 흙, 물, 공기, 불의 4가지 원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엠페도클레스의 4원소설은 이 원소들이 변하지 않는다는 설명에서 끝났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기본 원소들에 4가지 성질을 도입하였고, 기본 원소들은 그 중에서 2가지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주장은 아래와 같습니다.
- 흙 - 차가움, 건조함
- 물 - 차가움, 습함
- 불 - 뜨거움, 건조함
- 공기 - 뜨거움, 습함
그는 이를 바탕으로 이 세계에 다양한 물질이 존재하는 이유를 4원소가 포함된 비율의 차이로 설명하였습니다. 예컨대 금속은 녹아서 물처럼 변할 수 있고, 고온에서는 타기도 하기에 4원소를 모두 가지고 있으나 그 중에서 단단한 성질을 가진 흙이 가장 많이 포함되어 있기에 금속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중세의 연금술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연금술은 4원소의 비율을 다르게 해서 납이나 철 등의 금속을 금으로 바꿀 수 있다는 생각에서 기인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4원소설을 바탕으로 중력을 설명했습니다. 4가지의 원소는 각각 고유한 위치[4]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위치에서 벗어나게 되면 자연히 본연의 위치로 돌아가려는 성질을 가진다는 설명이 그것입니다. 그로 인해 흙으로 된 지구 상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운동이 상승 운동과 낙하 운동밖에 없다는 점이 설명됩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체의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제5원소를 도입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후대의 철학자들에게 비판과 조롱을 받게 되었으나 그의 입장에서는 필연적인 것이었습니다. 하늘의 모든 별들이 같은 속도로 원을 그리면서 움직이고 있으니, 우리가 관찰하기에는 항상 그 상태를 유지하면서 운동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4원소설을 통해 그것을 이해하려고 하면 하늘에서도 상승 운동과 낙하 운동만이 자연스러운 운동이 되어 원 운동이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운동이 되어버립니다. 그렇기에 그는 어쩔 수 없이 하늘에 제5원소인 아이테르(αἰθήρ) 를 도입한 것입니다.
운동 이론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구에서의 운동을 자연 운동과 강제 운동으로 구분했습니다. 모든 변화에는 원인이 존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이 두 가지 운동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이론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자연 운동의 경우에는 4원소설에 입각하여 우주 내에서 본연의 자리를 찾아가려는 물체의 고유 성질 때문이라고 설명하였으며, 강제 운동의 경우에는 항상 외부에서 힘을 공급받아야만 이루어진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이론은 중세 시대에 부분적으로 수정되기도 하였으나 갈릴레오 갈릴레이, 아이작 뉴튼 등이 정립한 새로운 역학 이론이 나오기 이전까지 자연철학자들의 신뢰를 받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낙하 운동에 대해 낙하하는 물체의 무게가 클수록 빨리 떨어지고, 매질의 밀도가 작을수록 빨리 떨어진다고 설명했습니다. 예컨대 큰 바위는 작은 돌멩이보다 빨리 떨어지며, 같은 물체라도 물 속에서보다 공기 중에서 더 빨리 떨어지는 점이 그러한 경우에 해당합니다. 이렇게 복잡한 방식으로 설명했던 이유는 투사체 운동에 있어 물체가 공중에서 움직일 때 그것을 움직이는 동인이 없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투사체 운동의 동인을 공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연직 상방으로의 운동에 대해, 물체가 외부의 동인이 없어진 뒤에도 계속 올라갈 수 있는 이유 역시 공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했습니다. 예컨대 돌멩이를 위로 던지면 돌멩이 주위의 공기에도 힘이 가해져서 손에서 멀어진 때에도 공기가 돌멩이의 동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공기의 미는 힘으로 일정 정도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우주론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존의 자연철학자들이 내놓은 견해들을 비판하고 종합하여 우주의 중심에 지구가 놓인 형태의 체계를 제안했습니다. 이 체계는 일상적인 경험에 어느 정도 들어맞고, 성경에도 부합하기 때문에 17세기의 천문학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일반적으로 인정받는 이론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경험에 입각하여 지구 중심의 우주 체계를 생각했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4원소설 등의 사변적인 논의에 입각하여 지구가 반드시 중심에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우주의 중심인 지구가 있고 그것을 9개의 구가 둘러싸고 있는 모양입니다. 가장 안쪽에 달의 천구가 있고, 그 위쪽에 수성과 금성, 태양의 천구가 있으며, 더 높은 곳에는 화성, 목성, 토성의 천구가 있고, 마지막으로 항성 천구가 있고 제일 외곽에는 제10천이라고 하는 프리뭄 모빌레가 있습니다. 프리뭄 모빌레는 모든 천구들이 회전하는 것에 동인으로 작용하는 천구입니다.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의 자연과학
BC 330년 경,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 (Αλέξανδρος Γ' ο Μέγας) 은 그리스, 소아시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페르시아에 이르는 장대한 원정으로 왕국의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그는 출정 때마다 항상 공학자, 지리학자, 측량 기사를 함께 데리고 가서 정복한 땅의 지도 제작과 자원 기록을 맡겼습니다. 그의 엄청난 정복활동은 그리스 문화가 다른 문화의 영향을 받는 계기가 되었으며, 무엇보다 고대 그리스의 문화가 널리 퍼질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의 문화가 광범위한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공통의 문화가 형성되었던 시대를 헬레니즘 시대라고 부릅니다. 보다 엄밀하게 나누자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열병으로 인해 사망한 BC 323년 경부터 이집트가 로마 제국에 의해 멸망된 BC 30년까지를 헬레니즘 시대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집트의 멸망에도 헬레니즘 문화는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으며, 동로마 제국의 후예인 비잔틴 제국이 멸망한 1453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무세이온
그리스 철학의 주된 관심사가 자연현상에서 인간에 대한 문제로 변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에 대한 연구의 중심지는 아테네에서 알렉산드리아로 바뀌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나일 강 하구에 위치한 계획 도시로, BC 331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건설되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열병으로 인해 33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그의 제국은 셋으로 분할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인데, 이 왕조의 왕들은 학문에 대해 많은 후원을 해주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알렉산드리아에 학술연구기관인 무세이온 (Museion) 을 세우고 학문을 장려하였습니다. 무세이온은 국가적인 지원이 병행되면서 국제적으로 학문 연구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무세이온 설립의 첫 번째 이념은 지식의 보존으로, 독자적인 도서관을 갖추어서 다양한 분야의 서적들을 소장하였습니다. 전성기 때에는 75만 권 정도의 장서가 있었다고 전해지며, 장서 중에는 종교, 역사서, 수학, 의학, 천문학 등의 분야가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무세이온 설립의 두 번째 이면은 지식의 증대로, 100여 명의 연구원을 초빙하여 조직적으로 학문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연구 분야로는 수학, 천문학, 의학, 문학의 분과가 있었으며, 부속 기관으로 식물원, 동물원, 천문대, 화학 실험실, 해부실, 도서관 등이 있었습니다. 토론이나 강의를 위한 강의실도 있었으며, 제단, 식당, 산책로, 연구원들이 사용하는 기숙사 등의 시설 역시 갖추고 있었습니다. 무세이온 설립의 세 번째 이념은 지식의 전파로, 무세이온에서 연구한 연구원들을 각 지방으로 보내서 지식의 보급을 도모하였던 것입니다.
무세이온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후원 덕분에 국제적인 지위를 확보하였고, 국왕이 공동 신탁기금을 출자하여 자치 단체를 구성하였습니다. 국왕이 임명한 신성관과 출납관, 회계관에 의해 관리되었습니다. 이곳의 회원에게는 무료 식사, 납세 면제 등의 혜택이 제공되었으며, 회원의 선임에는 국왕의 승인이 필요했습니다.
무세이온의 의의는 세계 최초로 과학을 제도화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과학 연구를 지원하였다는 데 있습니다.
생물학 분야
헬레니즘 시대에는 생물학이 크게 발달하며 많은 생물학자들이 배출되었는데, 그 중에서 헤로필로스와 에라시스트라토스가 대표적입니다. 헬레니즘 시대의 생물학자들은 처음으로 인체의 해부를 시작하였고, 왕의 지원을 통해 중형을 선고받은 죄수들의 생체를 해부하기도 했습니다. 헬레니즘 시대 이전에도 인체 해부가 도덕-종교적 측면에서 비판을 받고 금기시되었기에 그들이 해부를 할 때에도 큰 논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다시 해부가 금기시되어서 헬레니즘 시대의 저명한 의학자인 갈레노스는 인체 대신에 아프리카 원숭이를 해부하여 연구했습니다.
수학 분야
에우클레이데스
헬레니즘 시대의 수학 분야에서 가장 큰 명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후의 수학에도 엄청나게 큰 영향을 주게 된 사람이라면 에우클레이데스 (Εὐκλείδης) 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에우클레이데스는 영어식으로 읽은 '유클리드'라는 이름으로도 많이 알려졌으며, 기존의 수학 지식을 집대성한 전 13권의 저작인 『Στοιχεῖα』 (원론) 로 유명합니다. 『Στοιχεῖα』에는 최소한의 공리에서 출발하여 다양한 정리들을 유도하는 증명 과정이 실려있습니다.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Στοιχεῖα』에 대해 "젊은 시절에 이 책을 읽고 황홀해 하지 않은 사람은 이론을 탐구할 만한 자격이 없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는데, 이 말은 『Στοιχεῖα』가 단순히 기하학에 관련된 저작이 아니라 연역적 추론의 모범적인 사례라는 점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아르키메데스
시라쿠사 출신의 아르키메데스 (Ἀρχιμήδης) 역시 헬레니즘 시대의 상징적인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입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에우클레이데스 밑에서 수학하였으나 당시의 관습을 따르지 않고 시라쿠사로 돌아왔습니다. 이는 그가 당시 시라쿠사의 왕이었던 히에론 2세와 연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그는 역학, 수학, 기술 분야에 관련된 여러 업적들을 남겼으며, 역학과 수학에 대한 저술들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히에론 2세가 새로 만든 자신의 금관이 온전한 순금으로 제작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아르키메데스에게 부탁했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그는 금관을 녹이지 않고서 온전한 순금으로 만들어졌는지 알아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심하였고, 어느날 물이 가득 찬 목욕탕에 들어가면서 넘쳐 흐른 물의 양이 물 속에 잠긴 자신의 신체 부피와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같은 원리로, 금관을 물에 넣어서 넘친 물의 양과 금관과 같은 무게의 금덩이를 물에 넣어서 넘친 물의 양을 비교해보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아르키메데스 원리'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이 원리의 발견으로 인해 흥분한 그는 벌거벗은 상태로 "유레카" (Eureka) 를 외치며 거리를 뛰어갔다고 전해집니다. 훗날 영국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앨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는 아르키메데스의 발견에 대해 "이때가 언제였는지 그 날짜를 알 수 있다면 우리는 이 날을 수리물리학의 창시일로 기념해야 할 것이다”라고 평했습니다.
중세의 자연과학
“중세가 과학적으로 불모였다고 말하는 것은, 잉태한 부인이 아기를 낳지 않는다고 불모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스운 일이다.”
중세 시대는 476년에 있었던 서로마 제국의 멸망부터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등이 시작된 14세기 말 ~ 15세기 초까지를 뜻합니다. 로마 제국의 멸망과 함께 도시 형태의 문화 생활이 촌락 형태로 바뀌었으며, 황폐화화 함께 자연경제로 퇴보하였습니다. 봉건 제도의 하부 구조인 장원 제도가 널리 퍼졌는데, 모든 토지는 영주의 소유이며 농민들이 이것을 대여하여 경작하는 방식입니다. 농민은 고대 사회의 노예와 근대의 시민의 중간적인 위치로 볼 수 있는데, 영주의 토지인 장원에 구속되어 착취를 당했습니다. 이렇게 자급자족의 폐쇄적인 자연경제가 전형적으로 나타났고, 그에 따라 전통과 권위가 중시되는 사회였습니다. 이런 상황 하에서 중세인들은 개인적인 창의성이나 지적 욕구 등을 충족시키기 어려웠습니다.
흔히 중세 시대를 암흑 시대라고 부르기도 하나, 서양의 중세에서도 기술과 생산력의 계속적인 발전이 있었습니다. 학문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중세 초기부터 10세기까지는 암흑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로마의 학자들이 기존의 그리스 학문과 그 업적들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며, 중세 초기의 기독교는 성경을 연구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중세 유럽에서는 기독교에 의해 학문에 대한 억압이 지속되었으나, 한편으로는 새로운 지식에 대한 욕구가 점점 증가했습니다. 이러한 욕구는 10세기 경부터 이슬람 문명권을 통해 들어온 그리스-이슬람 학문을 통해 채워지게 되었습니다.
이슬람 문명권의 자연과학
흔히 아랍 과학이나 이슬람 과학으로 불리는 이슬람 문명권의 자연과학은 8세기 경부터 15세기까지 이슬람 문명권의 지배영역 내에서 발달했던 자연과학을 뜻합니다. 이 과학은 8세기 중엽에 그리스의 과학 저서들이 아랍어로 번역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슬람 문명은 이슬람교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였기 때문에 과학 분야에 있어서 가톨릭을 주로 믿던 유럽 문명과는 다른 양상을 보였습니다. 정치와 종교의 지도자였던 칼리프들은 처음에는 배타적이었으나,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종교나 민족에 대한 차별을 없앴습니다. 또한 저명한 학자와 기술자들을 초빙하여 고대 그리스 문헌을 번역하고 그것에 대한 연구를 독려했습니다.
처음에 아랍어로 번역된 저작들은 페르시아어와 시리아어로 된 의학, 천문학에 대한 서적들이었습니다. 그리스어로 된 저작들을 직접 번역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리스 과학의 영향을 받은 책이나 그리스어를 페르시아어나 시리아어로 번역해놓은 것이었기에 그리스 과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이렇게 페르시아어와 시리아어로 된 저작들을 어느 정도 번역하여 지식을 축적한 이후로는 그리스어로 된 책들을 구해서 직접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열성적인 지식 추구로 인해 수십 년 내에 고대의 중요한 과학 저서의 대부분이 아랍어로 번역되었습니다. 9세기 경에는 이러한 번역 작업이 칼리프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더욱 왕성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지혜의 집
서기 828년, 4대 칼리프인 알-마문은 바그다드에 '지혜의 집'이라는 도서관 겸 연구소를 설립하여 학문을 장려했습니다. 이 기관은 헬레니즘 시대의 무세이온에 필적하는 연구 기관으로, 비잔틴 제국의 허가를 얻어 그리스어 원전들을 구하기 위해 사람을 보낸 다음에 구해온 자료들을 모두 아랍어로 번역하였습니다.
이슬람 문명권은 이러한 지식의 집약을 통해 더욱 넓은 시각을 가질 수 있게 되었으며, 독자적으로 이러한 지식들을 발전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각각의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내놓은 학자들이 많아졌으며, 유럽에까지 이름이 알려진 사람으로는 알-킨디, 알-하이셈, 아비케나, 이븐 루시드 (아베로에스) 등이 있습니다. 이들의 연구는 이슬람 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유럽으로 전파되어 중세 유럽의 과학이 형성되는 것에도 매우 큰 영향이 되었습니다.
수학
아라비아 숫자
이슬람 문명권에서는 현재 우리가 아라비아 숫자라고 하는 문자들을 사용하는 기수법을 널리 활용했습니다. 최초로 아라비아 기수법을 사용한 저작은 874년에 발표되었습니다. 이 기수법은 인도에서 유입된 것이라고 전해지며, 이슬람 문명권에서도 인도 숫자라고 하였으나 그 기원이 다소 불확실합니다. 어떤 수학사가들은 인도 숫자라고 부르는 것이 그 기수법이 인도에서 기원한다는 의미만은 아닐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이슬람의 수학자들이 10진법으로 된 아라비아 기수법을 주로 사용했으며, 이 기수법을 세계적으로 보급하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이 기수법의 사용을 통해 인류가 더욱 큰 발전을 거두게 되었던 것 역시 자명한 사실입니다.
아라비아 기수법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입니다. 이 기호는 '없다'는 의미를 가진 것인데, 이 기호의 도입이 수학의 역사에서 위대한 혁신 중 하나로 여겨지는 것이 다소 신기하게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이는 을 사용하지 않는 기수법을 생각해보면 그 의문이 풀릴 것입니다.
유럽의 경우, 13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아라비아 기수법이 도입되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로마식 기수법을 사용하였는데, 아라비아 기수법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문자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로 인해 간단한 산술 역시 대단히 복잡한 문제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라비아 기수법은 로마식 기수법에 비해 편리하였으며 계산에 걸리는 시간을 크게 단축시켰습니다.
알-콰리즈미와 대수학
페르시아의 수학자이자 과학자인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이븐 무사 알-콰리즈미 (أبو عبد الله محمد بن موسى الخوارزمي) 는 수학, 천문학, 지리학 등에 대한 공헌으로 대단히 유명했으며, 그의 저작들은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으로 전파되기도 했습니다. 현재 그가 집필한 원본은 없어졌으나 라틴어 번역본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번역본에는 기하학적인 방법을 통해 1차 방정식과 2차 방정식의 해를 구하는 방법과 실용적인 측량 계산이나 유산 상속에 관한 문제 등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연금술
이슬람의 연금술은 10세기 무렵에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이슬람 문명의 과학이 큰 성과를 거둘 때부터 나타났습니다. 또한 중국에서 있었던 연금술의 영향도 받았던 것이 확실한데, 당대의 이슬람 문명은 동양과 서양의 연금술이 만나는 지점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10세기 이슬람의 연금술은 8세기에 활동했던 아부 무사 자비르 이븐 하이얀 (جابر بن حيان بن عبد الله الأزدي) 의 사상을 기반으로 했습니다. 그의 저작인 『Summa perfectionis』 (완전한 전서) 에 따르면 그의 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에 근거하여 약간의 독창적인 변형을 했습니다. 그는 실제의 금속은 두 가지의 기본적인 성질을 가지고 결합되어 있는 것인데, 그 성질이 금속에 여러 가지 성질을 부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금속의 두 가지 기본적인 성질은 보다 기본적인 온, 냉, 건, 습의 4가지 성질과는 별도로 황과 수은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오랫동안 많은 연금술사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13세기에는 그의 라틴어 이름인 게베르 (Geber) 를 사용하는 연금술사인 가짜 게베르 (Pseudo-Geber) 가 있기도 했습니다.
자비르에 따르면 연금술사가 해야 할 것은 기본적인 두 성질이 물질 내에 어떤 비율로 들어있는지 알아내는 것과 순수한 성질을 만드는 일, 원하는 생성물을 만들기 위해 기본적인 성질들을 적절한 양으로 결합하는 일입니다. 이를 위해 다양한 실험들을 행해야 하는데, 그의 연금술 이론에 따르면 4원소의 조합에 따라 고체 원소인 황과 수은이 생성되는데 이 두 가지 금속을 적절하게 조합하면 어떤 금속이든 만들 수 있습니다. 또한 납을 분해하여 얻은 황과 수은을 다른 특정한 비율로 결합하면 금을 만들 수 있다고 했는데, 이 과정을 위해서는 건조시킨 약용 분말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이슬람의 연금술에서 자비르 다음으로 중요한 사람은 10세기 경의 알 라지 (أبو بكر محمد بن يحيى بن زكريا الرازي) 입니다. 그는 의사였기에 대부분의 저작이 의학과 관련된 내용이었으나 연금술에 대한 저작도 많이 남겼습니다. 그 중에서도 『Kitab al-asrar』 (비밀의 책) 이 가장 유명한데, 이 책은 이름과는 달리 실제적인 방법론과 관련이 있습니다. 물질, 기구, 방법의 세 부분으로 분류되어 있으며, 금속전환이 가능하다는 생각에 기반하기는 하지만 현대의 화학적인 방법과 유사하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침체기
이슬람 문명권의 과학은 11세기 초에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으나, 12세기로 들어서자 천문학을 제외한 분야에서는 침체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학문적 침체기가 생기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분석이 있으나, 학문에 적대적인 이슬람 정통파가 세력을 잡게 되었고 경제적인 상황 역시 나빠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통설입니다. 그나마 계속 발전하던 천문학도 15세기가 되자 완전한 정체 상태가 되어 새로운 학문이라고 하는 것이 아예 없게 되었습니다.
중세 유럽의 과학
아랍어로 번역된 그리스 학문들과 이슬람 문명권에 의해 발전되기 시작한 자연과학은 10세기 말부터 이슬람의 지배 하에 있었던 스페인과 시칠리아 섬을 통해 유럽으로 유입되었습니다. 본격적인 유입은 11세기 말에 이슬람 지배 하의 스페인 남부 톨레도와 시칠리아 섬이 함락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슬람 문화가 번영하던 지역이 중세 유럽으로 포함되면서 많은 학문들이 함께 유입된 것입니다.
지적 허기에 시달리던 유럽인들은 이렇게 유입된 학문들을 라틴어로 옮기기 시작하였고, 12세기 초부터 많은 학자들이 스페인과 남부 이탈리아로 몰려들었습니다. 이렇게 번역된 책들은 아리스토텔레스, 갈레노스, 프톨레마이오스, 아르키메데스 등의 저작이었으며, 이와 함께 알-킨디, 알-하이셈 등의 이슬람 문명권의 학자들의 저작들도 함께 번역되었습니다. 이렇게 번역된 책들은 대부분 아랍어로 되어 있었기에 번역 과정에서 많은 오류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후 르네상스 시대에 원전을 추구하는 운동은 이러한 오류를 수정하자는 맥락에서 있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대학
이슬람 문명권을 통해 들어온 학문들을 번역하면서 엄청난 규모로 지식이 팽창했고, 그 결과로 인해 새로운 교육 기관인 대학이 설립되기 시작했습니다. 대학 이전에 중세 유럽의 교육을 담당했던 기관은 수도원의 학교와 성당의 학교였습니다. 이러한 학교들은 새로운 학문에 적대적이지는 않았으나 무엇보다도 신앙을 중시했기 때문에 새로운 학문을 발전시킬 만한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대학이라는 기관이 새로운 학문을 발전시키는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12세기 말에 프랑스의 파리, 영국의 옥스포드, 이탈리아의 볼로냐와 파도바 등지에서 대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설립된 대학들은 대부분 교양학부, 법학부, 신학부, 의학부로 구성되었습니다. 법학부, 신학부, 의학부는 모두 교양학부를 거친 다음에 들어갈 수 있었으며, 교양학부에서는 인문학 계열인 문법, 수사학, 논리학과 이학 계열이라 할 수 있는 산학, 기하학, 천문학, 그리고 예술 계열이라고 할 수 있는 음악을 가르쳤습니다. 13세기 초에는 교양학부의 주된 교과목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과학, 철학 등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이렇게 변한 이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이 거의 모든 분야를 포함하고 있는 거대한 통일적 체계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학문에 대한 단죄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주의적 전통에 입각하여 학문적 연구를 하였기 때문에 그의 사상에는 기독교의 교리에 위배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학문이 대학의 주된 교과목이 되자, 신학자들과 교양학부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사상가들 사이에 심한 마찰이 생겼습니다. 당시의 교양학부 교수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석자였던 이븐 루시드 (아베로에스) 의 해석과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이었으며, 신앙과 과학의 영역을 분리해서 생각해야 하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신앙은 신앙의 영역에서 고유한 진리를 가지며, 과학은 과학의 영역에서 고유한 진리를 가지기에, 자연탐구는 신앙의 영역이 아닌 과학의 영역에서 이성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이 그들의 신념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기독교 신앙을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일은 전혀 하지 않았고, 자연탐구라는 것 이외에는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과학과 신앙의 영역을 분리하며 각각의 영역에 고유한 진리가 있다는 주장을 이중진리설 (二重眞理說) 이라고 하는데, 이중진리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과학의 영역에서 기독교 교리에 반대되는 내용을 자유롭게 가르쳤습니다.
13세기 초에 시작된 신학자들과 아리스토텔레스-아베로에스주의자들의 마찰은 점점 심해져서 주교와 교황까지 개입하게 되었으며, 결국 여러 차례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자연철학에 대한 단죄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단죄 중에서 가장 심한 정도였던 것은 1277년에 파리에서 내려진 단죄였습니다. 이 단죄는 이후의 중세 학문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277년 단죄는 파리 교구에서 교양학부 교수들의 가르침 중에 219개의 명제를 지정하여 그것을 가르쳐서는 안된다는 공고를 했던 것인데, 이것을 어긴 사람은 교회에서 파문당하며 학자로서의 생명이 끝나게 되었습니다. 이 단죄를 통해 금기시된 명제 중에는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 세계에서 유일한 현자는 철학자들 뿐이다.
- 어떤 일도 우연히 일어나지 않으며, 모든 일은 필연적으로 일어나며, 앞으로 일어날 모든 미래의 일들은 필연적인 것이다.
- 최초의 원인은 여러 개의 세계를 만들 수 없었다.
- 적당한 인자 없이 사람이 신에 의해서만 만들어질 수는 없다.
- 신은 새로운 행위의 원인일 수 없으며 어떠한 새로운 것을 만들 수도 없다.
- 신은 하늘을 움직여서 직선운동을 하게 만들 수 없으며, 그 이유는 진공이 남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 학문이 주된 학문이 되자 반기독교적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기독교에 대한 영향을 줄이려고 하는 노력이 계속되었으나 결국 이러한 모든 시도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가장 강력했던 1277년의 단죄 역시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으며, 오히려 학문의 발전을 저해하는 일로만 작용했습니다. 반기독교적 요소의 제거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이 상당히 체계적이었으며 통일된 이론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거슬리는 부분 몇 가지를 제거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학문 제반에 존재하는 반기독교적 성향을 없애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학문의 기독교화는 결국 역으로 신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게 되면서 완전한 실패로 끝납니다.
그러나 교회의 이러한 시도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영향을 주기도 했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를 넘어선 새로운 생각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점이 그것입니다. 그의 역학 이론을 넘어선 새로운 역학 이론의 모색 역시 교회의 아리스토텔레스 학문에 대한 탄압 덕분에 가능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중세 후기의 과학적 논의
오컴의 윌리엄
교회의 단죄에 영향을 받아 등장한 사조 중에서 중세 과학의 방향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오컴의 윌리엄 (William of Ockham, 1285 ~ 1349) 의 학설입니다. 그는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도사이자 철학과 논리학에 탁월한 신학자였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신학을 해방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신이 무엇이든 창조할 수 있으며, 이렇게 창조된 것들에는 어떠한 필연적 연관성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로 필연적 연관성의 부재라는 지점에서 출발하여 모든 지식이 선험적인 방식이 아니라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얻어질 수 있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이는 급진적 경험주의라고 할 수 있는 결론입니다. 또한 그는 보편 개념이란 실재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개개의 물체를 나타내기 위한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그가 제안한 합리적 명제 선택 방식인 오컴의 면도날 역시 과학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이것에 따르면 필요하지 않은 가정들을 하지 않고 최소한의 논리로 설명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입니다. 이 원리는 현대의 과학에서 이론을 세울 때에도 사용되는데, 필연성이 없는 여러 가지 개념들을 배제하여 문제 자체를 단순화시켜서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효율적이기 때문입니다.
지구의 자전에 대한 논의
중세 학자들 중에서는 우주론과 운동 이론에 있어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벗어난 생각을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영국 옥스포드 대학의 머튼 학파와 장 뷔리당, 니콜 오렘 등이 있으며, 이들의 업적은 이후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 갈릴레이 등에게 영향을 주기도 했습니다.
중세의 지배적인 우주 체계는 지구만이 움직이지 않으며 지구의 주위를 다른 천구들이 돌고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관이었는데, 단죄 이후로 등장한 14세기 파리의 유명론자들은 지구의 자전 가능성에 대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파리 대학의 유명론자인 장 뷔리당 (Jean Buridan, 1295 ~ 1358) 과 니콜 오렘 (Nicole Oresme, 1320 ~ 1382) 은 지구가 자전한다는 가정 하에서도 천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뷔리당의 견해에 따르면, 별들의 일주운동이 하늘이 지구 주위를 한 바퀴 도는 것으로도 설명할 수 있으나 지구가 그 축을 중심으로 하루에 한 바퀴 도는 것으로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5] 그러나 뷔리당은 결국 경험적 이유에서 지구는 정지해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수학자이자 신학자로, 조화급수의 발산을 처음으로 증명하기도 했던 니콜 오렘 (Nicole Oresme, 1320 ~ 1382) 은 지구의 자전 가능성에 대해 뷔리당보다 진지하고 예리하게 접근하였습니다. 그는 지구가 자전한다면 수직으로 던진 돌멩이가 뒤에 가서 떨어질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지구가 돌 때 공기와 물 등의 다른 물체들도 지구와 함께 돌기 때문에 돌멩이도 지구와 똑같이 돌기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하늘이 운동한다는 점을 눈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운동의 상대성을 통해 반박했습니다. 지구가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지구 위의 우리는 하늘이 도는 것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에 확실하게 결정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이 태양을 멈추게 했으며 지구가 멈추게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지구가 부동이라는 성경에 기반한 주장에 대해서는 신이 기적을 행할 때 자연의 일반적 원리에 대한 혼란이 가장 적은 방식으로 행하는 것을 선호할 것이기 때문에, 큰 천구를 멈추는 것보다 돌고 있는 지구를 멈추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반박했습니다. 여기에서는 그가 오컴의 면도날에서 받은 영향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렘 역시 지동설을 제창한 것이 아니라 가능성에 대한 논의를 한 것이며, 결국 그는 그 문제에 대해 확실하게 결정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또한 시편의 구절을 인용하며 전통적인 우주 체계를 그대로 인정했습니다.
이렇게 뷔리당과 오렘의 논의는 상당히 중요한 관점들을 보였으나, 결국 신앙에 기인하여 기존의 전통적인 우주관을 지지하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논의는 이후에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제안할 때 사용되면서 다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물체의 운동에 관한 논의
뷔리당과 오렘은 물체의 운동에 관한 새로운 이론의 탄생에도 큰 기여를 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 이론에서는 진공을 아예 불가능한 것으로 다루었지만 중세의 스콜라 학자들은 진공이 존재할 경우를 상정하여 연구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그들은 진공 속에서 낙하하는 물체는 무게에 상관 없이 똑같은 속도로 떨어진다는 생각도 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 학문에서 벗어나는 논의들이 지속되면서 공기 내의 운동과 진공 상태에서의 운동을 가장 잘 설명하는 임페투스 이론이 등장했습니다. 임페투스 이론을 체계화했던 사람은 뷔리당이었습니다.
임페투스 이론에 따르면 외부의 동인이 최초로 물체와 닿을 때 임페투스라고 하는 힘을 부여하기 때문에 동인을 떠나서도 운동을 지속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뷔리당은 임페투스의 크기가 물체의 속도와 질량에 좌우되며, 외부의 저항에 의해 감소하거나 변화하지 않을 경우에는 영원히 지속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이후에 등장하는 에너지와 관성이라는 개념과 상당히 비슷합니다. 그러나 임페투스라는 개념은 결국 동인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니콜 오렘은 낙하하는 물체가 통과한 거리에 대한 연구를 하던 중에 중간속도 정리라는 것을 기하학적으로 접근하여 처음으로 증명했습니다. 중간속도 정리는 자유낙하운동과 같이 속도가 일정하게 변하는 운동에서 물체가 일정시간 동안 통과한 거리는 그 물체가 그 시간의 중간에 도달한 속도로 등속 운동을 하는 물체가 같은 시간에 통과한 거리와 같다는 정리입니다. 오렘은 직각삼각형과 직사각형을 이용하여 이것을 증명했는데, 밑변이 시간을 나타내고 빗변이 균일한 속도의 변화를 나타내는 직각삼각형과 중간에서 얻어지는 속도와 시간이 만드는 직사각형의 면적이 같다는 것을 보였습니다. 오렘의 증명은 이후에 낙체의 법칙을 정리한 갈릴레오 갈릴레이에게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중세의 기술
승마
말을 이용하여 동력을 공급하는 기술은 그 이전에도 있었으나 중세에는 더욱 효과적인 방법이 탄생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중국에서 유럽으로 유입된 기술들이 많았습니다. 말을 제어하는 장치와 안전 장치, 견인 장치 등이 개발되어 말의 동력을 이용한 토지 개간이 가능해졌고, 그로 인해 경작 면적과 생산량의 증가를 이룩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말을 교통 수단으로 활용하면서 여러 사회들 간의 접촉과 물물 교환 등이 촉진되어 폐쇄적이었던 중세 사회에 변화를 주었습니다.
풍차
바람을 동력으로 사용하는 장치는 7세기에 이슬람 문명에서 처음으로 개발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도 풍력을 이용한 오르간에 대한 기록이 있긴 하지만 풍차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이슬람 문명의 풍차는 돛이 달린 축이 수직으로 세워져서 회전하는 수평형의 구조였는데, 돛의 일부에만 바람이 닿았기 때문에 효율이 낮았습니다.
유럽에 풍차가 도입된 것은 12세기 이후였는데,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유입되었다는 추측도 있으나 근본적으로 이슬람의 풍차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유럽 풍차는 회전축이 지면과 수평인 수직형 풍차였던 것입니다. 유럽 풍차에 대해 가장 오래된 기록은 1180년 경에 작성된 문서인데, 노르망디의 한 수도원에서 풍차 부근의 토지를 양도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후 풍차는 개량을 거치면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13세기 벨기에의 이프르 지방만 해도 120개의 풍차가 세워질 정도로 널리 보급되었습니다.
화약과 대포
이전부터 유럽에서 불꽃을 만드는 기술이 있었으나 화약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4세기 초였습니다. 흑색 화약에 대한 지식이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것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흑색 화약의 제조와 관련된 지식들이 어떤 경로로 유럽에 전파되었는지에 대해 확실하게 알아낼 수는 없지만, 중국 문명이 유럽보다 화약에 대한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1044년에 집필된 『武經總要』 (무경총요) 에 화약의 처방과 관련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원료의 대부분이 탄화수소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폭약이라기보다는 격렬하게 타는 불 정도로 생각할 수 있으나, 이것이 개량되면서 질산칼륨이 첨가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에 대나무로 만든 통에 화약을 담아서 던지는 초창기의 수류탄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화약이 개량을 통해 더욱 강력하게 되자, 통에 화약과 발사체를 집어넣은 다음에 불을 붙여서 발사체를 멀리로 쏘아보내는 장치가 탄생했습니다. 이후 금속제의 총신을 사용하여 화약의 힘을 더욱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원시적인 형태의 총이 개발되었습니다. 이후 총은 유럽의 전쟁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무기가 되었으며, 동양으로 전파되기도 했습니다.
대포가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1345년인데, 에드워드 3세의 명령에 따라 만들어진 대포들이 프랑스 침공에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초창기의 대포는 크기가 굉장히 작아서 10 ~ 18kg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초창기 대포의 재질은 구리의 합금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조성은 알 수 없습니다. 또한 구경에 비해 사정거리가 짧은 편이였으며 비용의 문제 때문에 1350년 경까지 돌을 발사체로 사용했습니다. 14세기 중엽부터 대포의 크기가 급속도로 커졌고, 런던탑에 장착한 대포는 140kg, 180kg, 270kg의 중량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금술의 발달이 미약했기 때문에 종종 대포가 파열되는 사고가 있었으며, 1460년에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2세가 전투 중에 이런 사고로 죽기도 했습니다.
대포의 제작에는 많은 양의 철이 필요했고, 그에 따라 엄청난 양의 비용이 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방의 영주들은 대포를 갖기 어려웠으며 도시의 상공업자들의 지지를 받는 중앙의 왕은 쉽게 대포를 장만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봉건 귀족과 영주들의 세력이 약화되었으며, 봉건사회가 몰락하는 계기이자 근대 국가 형성의 기초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화약의 발전은 폭발 현상과 탄환의 비행에 관련된 문제 등을 탄생하게 하였으며,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연구 방식의 탄생과 기존 분야의 연구를 촉진시키기도 했습니다. 화약의 폭발과 관련된 문제들을 다루면서 물리학과 화학이 발전하였고, 포신의 정교한 제작을 목적으로 하면서 공학에서의 발전이 있었습니다. 탄환의 비행에 관련된 문제는 새로운 역학의 발달을 자극하는 역할을 하였고, 이것을 다루는 과정에서 수학에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나침반과 항해술
12세기 무렵, 천연 자석이 남쪽과 북쪽을 가리킨다는 성질이 유럽에 알려졌습니다. 또한 이 천연 자석에 문지른 바늘이나 철사를 나뭇잎 같은 것 위에 올린 다음에 물에 띄우면 북극성이 있는 쪽을 향한다는 사실도 발견되었습니다. 1180년 무렵에는 회전하는 축에 바늘을 얹어서 항해에 사용할 수 있는 장치가 개발되었고, 13세기 초에는 나침반 방위의 명칭이 32개로 분류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항해 지도가 정밀하게 만들어질 수 있었고, 연안을 항해하는 수준에서 원양을 항해하는 수준으로 변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신대륙을 탐험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전쟁을 하고 상업을 활성화하면서 정치와 경제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대륙을 발견하게 된 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었으며,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 역시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사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막대한 양의 금과 은이 유입되면서 유럽 경제에 큰 변화가 있었고, 16세기 초부터 1세기 동안 물가가 2 ~ 3배로 상승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변화는 고정된 지대수입으로 생활하는 지주나 임금을 받고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타격을 주었으며, 상인과 제조업자나 신흥자본가들에게는 매우 유리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인쇄술과 제지술
인쇄술의 발달 이전에는 책의 사본을 만들 때 사람이 직접 원본을 일일이 옮겨 적는 방식밖에 없었으며, 책값이 굉장히 비싼데다가 수량도 적은 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유 계층, 수도원, 대학만이 책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또한, 사람이 일일이 옮겨 적다보니 아무리 세심하게 작업을 한다고 해도 오자와 탈자가 자주 생겼습니다. 인쇄술은 이러한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기술이었으며, 인쇄술의 발달은 문명 자체에 큰 변화를 주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초창기의 인쇄술은 나무나 금속으로 만든 활자에 잉크를 바른 다음, 종이를 덮고 누르는 방식이었습니다. 이후 독일의 기술자 요하네스 겐스플라이슈 추르 라덴 춤 구텐베르크 (Johannes Gensfleisch zur Laden zum Gutenberg, 1398 ~ 1468) 에 의해 새로운 방법이 개발되었습니다. 그는 한번에 하나의 인장을 인쇄하는 것이 아니라 인장들을 조합하여 한 페이지에 해당하는 분량을 만들어서 인쇄하는 방법을 생각한 것입니다. 한 페이지 분량을 인쇄한 다음에 그것에 사용된 인장들을 분해해서 다음 페이지에 해당하는 분량을 만들 때에 사용할 수 있었기에 적은 활자를 가지고도 여러 종류의 책을 짧은 시간 안에 많이 인쇄할 수 있었습니다. 1434년에 구텐베르크는 좌우 2열로 나누어지고 1페이지당 42개의 행이 있는 라틴어 성경을 출판합니다. 구텐베르크 성경은 1282페이지로 되어 있으며, 총 300권이 인쇄되었습니다. 이것은 최초의 인쇄본 성경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후 인쇄술은 종교 개혁에도 큰 공헌을 했는데, 마르틴 루터가 가톨릭을 비판하는 95개조 반박문을 인쇄하여 부패한 교회를 공격하였기 때문입니다.
고대 바빌로니아에서는 점토판을 이용하여 기록을 남겼으며, 고대 이집트에서는 파피루스라는 식물을 이용하여 만든 종이를 사용했었습니다. 이후에 등장한 양피지는 파피루스보다 발전한 것으로, 양쪽 면을 모두 사용할 수 있는데다가 질긴 재질이었습니다. 중세에 제작된 대부분의 사본에는 양피지가 사용되었는데, 양피지를 이용해 200페이지 정도의 문서를 만들기 위해서는 양 25마리가 필요할 정도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책의 가격이 매우 비쌀 수밖에 없었고, 중세 시대까지 책은 대중적으로 보급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발명된 종이가 이슬람 문명을 거쳐 유럽에 전파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책의 대중적 보급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제지술은 중국 후한 시대의 환관이었던 채륜에 의해 발명되었는데, 그는 105년에 자신이 발명한 기술을 후한의 화제 (和帝) 에게 바치며 이것이 널리 사용되도록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채륜이 개발한 종이를 채후지 (蔡厚紙) 라고 불렀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이슬람인들이 사마르칸트를 정복할 때, 포로 중에 제지공이 있었으며 그를 통해 제지술이 이슬람 문명으로 유입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이슬람 문명권에서는 양피지가 종이로 대체되기 시작했고, 825년에 다마스쿠스에 제지 공장이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이후 제지술은 1150년 경에 이슬람인들에 의해 스페인으로 유입되었고, 1189년 경에는 남프랑스 지역에, 1276년 경에는 이탈리아에, 1309년에는 영국에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럽에 종이가 보급되었음에도 양피지는 한동안 사라지지 않았는데, 초기의 종이는 양피지에 비해 잘 찢어지는데다가 내구도가 좋지 않아서 보존이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종이의 질이 향상되면서 그 진가를 인정받게 된 것은 인쇄술의 발달 직후였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자연과학
르네상스 시대는 보통 15세기 초에서 17세기 초까지의 시기를 의미합니다. 이 시기에는 봉건 사회가 무너지면서 문화적인 측면에서의 변화가 있었고, 서양 세계에서 학문과 예술이 크게 부흥하였습니다. '르네상스'라는 단어는 다시 태어난다는 뜻을 가진 이탈리아어 rinascimento에서 유래하였으며, 18세기 중엽부터 볼테르 등의 지식인들이 사용했던 말입니다. 르네상스 시대는 그리스-로마 정신의 부활과 함께 인간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시도된 것이라는 생각이 이름 자체에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는 보통 에라스무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등의 인문주의자나 예술가들에 의해 대표되기에 과학과는 별 관련이 없을 것 같아 보이지만, 이 시대에 만연했던 새로운 사조들은 자연과학에도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상인과 수공업자 계층의 신분 상승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이전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민족주의적 사고가 점진적으로 발달했습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체계를 고수하던 중세 스콜라 철학에 대해 적대적인 경향이 만연했으며, 가톨릭 교회의 권위에 저항하는 종교 개혁이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또한 실용적인 학문과 신비주의, 연금술 등이 널리 퍼졌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특성
프로테스탄티즘
르네상스 시대에 일어난 종교개혁 운동을 통해 신 대신에 인간이, 교회 대신에 성경이, 중세의 스콜라 철학 대신에 그리스의 고전들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그 결과로 인해 신학에 의해 억압되었던 여러 학문에 있어 자유로운 연구가 가능해졌습니다. 당시의 상인과 장인, 항해사 중 많은 사람들이 청교도였는데, 그들의 지위가 상승하면서 과학과 기술에 대한 관심이 커졌습니다. 청교주의의 금욕적인 프로테스탄티즘은 과학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근면한 마음으로 자신의 직업에 종사하며 사치와 낭비를 배격하며 생활 제반에 있어 합리적이어야만 했습니다. 그 결과로 인한 재화의 축적이 자본을 형성하면서 금욕적인 소비억제로 투자되어 생산력의 확장을 이룩했습니다.
대항해
르네상스 시대에 흔하게 그려졌던 그림은 미지의 세계에 도달하는 배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질적인 사람과 동식물들이 서식하고 있는 신대륙의 발견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포르투갈의 엔리케 왕자가 시작한 서아프리카 항해 개척과 1492년에 있었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대서양 횡단, 1498년에 있었던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도착, 1519년부터 1522년까지 진행된 페르난도 데 마가야네스의 세계 일주 항해 등을 통해 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세계 각지와 접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지도 제작법의 발전으로 인해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되었으며, 상인이나 선교사들에 의해 세계적인 정보 교환이 가능해졌습니다.
대항해로 인한 지리적 발견은 사회 체제와 경제 체제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토지에 투자되던 자본이 항해와 무역 등의 분야로 이동하였고, 부자들은 더욱 많은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조선술과 항해술을 후원하였으며 이것이 근대 과학 탄생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조선술에 필수적인 운하와 수문의 건설, 광석의 채굴과 배수방법의 개선, 갱 내부 통풍에 대한 연구와 개량, 항해에서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는 정확하고 단순한 천문표, 항로를 그려 넣은 지도 작성 등에 과학자들이 큰 기여를 했던 것입니다.
새로운 사조와 재조명
르네상스 시대의 여러 가지 특성 중에서 우리의 주제와 관련된 것은 바로 학문의 발달과 관련된 부분일 것입니다. 우선 이 시기에는 중세 스콜라 철학의 학풍을 거부하고 그리스에서 시작되었던 원전 자체를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그리스어로 된 저작들을 아예 번역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이 아랍어로 번역된 것을 다시 번역한 것이었기 때문에 오류가 심각하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흐름으로 인해 비잔틴 제국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 프톨레마이오스, 플라톤, 갈레노스, 아르키메데스 등의 주요 사상가들의 원전과 헬레니즘 시대의 신플라톤주의, 헤르메스주의 등에 관한 문헌들이 유입되었습니다.
기존의 학계에서 라틴어만이 사용되었던 것에 반해, 르네상스 시대에는 여러 민족의 언어들이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민족적 의식이 성장하면서 함께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급속도로 신분 상승을 하게 된 수공업자와 상인들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학문적인 성과를 알리기 위해 자신의 민족에서 사용하는 언어로 저술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뜻입니다. 에우클레이데스 (유클리드), 아르키메데스, 헤론 등의 저작이 이탈리아어로 출판되기도 했으며, 이후 17세기의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주요 저작들을 이탈리아어로 쓰기도 했습니다.
중세의 스콜라 학파는 어떤 이론을 입증하기 위한 방법으로 논리만을 중시하였는데, 르네상스 시대에서는 직접적인 경험인 관찰과 실험을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이 때문에 직접적인 관찰을 주로 사용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학 저작과 아르키메데스의 저작들이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바로 이전 시대인 중세에서는 로저 베이컨이 재조명되었고, 오컴의 윌리엄의 급진적 경험주의 역시 재조명되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르네상스 시대는 중세와 완전히 단절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교회의 권위와 봉건적 지배체계가 쇠퇴하면서 기술의 발전과 신분 상승이 이루어졌고,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수공업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다양한 도구들을 만들 수 있게 되었으며, 갈릴레오 갈릴레이 역시 자신의 작업장에서 망원경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신비주의
신비주의가 널리 퍼졌다는 점 역시 르네상스 시대의 특성 중 하나입니다. 대표적으로 우주의 신비를 푸는 것이 수학, 그 중에서 특히 기하학에 있다고 믿는 신플라톤주의와 우주가 신비한 힘들로 가득 차 있는 체계이며 인간은 이 힘들과 상호 작용을 해서 우주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헤르메스주의, 인간이 본질적으로 우주의 축소판이라고 생각하는 대우주-소우주 체계를 제시하였으며 성경의 내용을 수로 환원하여 해독하려고 했던 카발라주의 같은 것이 있습니다.
헤르메스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 중에서는 윌리엄 길버트가 있는데, 그는 자석이 밀고 당기는 힘을 공감과 반감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했습니다. 뉴튼의 만유인력 역시 이러한 생각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현대의 우리가 보기에 과학과 전혀 관계가 없고 오히려 과학의 발달을 저해한다고 생각되기도 하는 신비주의가 근대과학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또한 르네상스 시대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에 입각하여 납 등의 저렴한 금속을 높은 가치가 있는 금으로 바꾸기 위한 연구가 진행되었으며, 이것을 연금술이라고 부릅니다. 연금술은 다양한 신비주의적 시각과 관련을 가지고 있었으며, 현자의 돌이라고 하는 물질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이것을 만들기 위해 온갖 실험들을 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근대 화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만연했던 신비주의 중에서 헤르메스주의를 좀 더 상세하게 접근해보면 상당히 흥미롭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헤르메스주의는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직후에 '헤르메스 문헌' (Corpus Hermeticum) 이 이탈리아의 피렌체 지역에 소개되면서 유럽 전역으로 퍼지게 된 신비주의입니다. 당대의 사람들은 헤르메스 문헌을 쓴 사람이 모세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이집트의 사제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토스 (Ἑρμῆς ὁ Τρισμέγιστος) 라고 생각했으며, 1463년에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인 마르실리오 피치노 (Marsilio Ficino) 에 의해 라틴어로 번역되었습니다. 헤르메스 문헌은 성경보다 먼저 집필된 책이면서 모세와 대등하거나 더 위대한 현자가 쓴 책이라는 생각 때문에 유럽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고, 이에 따라 유럽에 헤르메스주의가 급속도로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나 1614년에 문헌학자 이삭 카우사보누스 (Isaak Causabonus) 에 의해 헤르메스 문헌이 고대 이집트의 저작이 아니라 1세기 경의 헬레니즘 시대의 저작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헤르메스주의는 영향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근대의 과학 혁명
천문학 혁명
천문학 혁명은 지구 중심의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 우주 체계가 태양 중심의 코페르니쿠스-케플러 우주 체계로 전환된 것을 의미합니다. 흔히 코페르니쿠스 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1543년,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라는 저작을 발표하는데, 이 저작은 태양 중심의 우주 체계를 제시하는 내용이었는데, 중세 이후로는 처음으로 제안된 지동설입니다. 물론 원운동에 집착한다든가, 아리스토텔레스적 천구의 개념을 여전히 사용한다든가 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으나 이러한 문제는 이후에 요하네스 케플러에 의해 보완되었으며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망원경을 이용한 천체의 관측을 시작하면서 코페르니쿠스의 생각은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1687년에 아이작 뉴튼의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가 발표되면서 천문학 혁명은 완결되었습니다.
코페르니쿠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Nicolaus Copernicus, 1473 ~ 1543) 는 폴란드의 크라코프 대학에 입학하여 인문주의 교육을 받은 이후로 이탈리아에 가서 10년 가까이 파도바 대학과 볼로냐 대학 등의 여러 대학에 다니며 법학과 의학을 공부하였습니다. 이탈리아의 대학들에서 그는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우주가 단순하며 질서와 조화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나치게 복잡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 체계를 대신할 만한 것을 모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모색의 결과로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태양의 중심을 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1510년 경에 이러한 생각을 『Commentariolus』 (코멘타리올루스) 라는 소책자를 통해 피력하였습니다. 이 책자는 유럽의 여러 천문학자들에게 보내졌는데, 코페르니쿠스는 이 이후로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사람들의 조롱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추정됩니다.
결국 코페르니쿠스가 생각한 태양 중심의 우주 체계는 그가 뇌일혈로 인해 죽은 해인 1543년에 『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라는 책을 통해 처음으로 발표되었습니다. 그가 죽기 4주 전의 날짜가 기록되어 있는 책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죽기 직전에 자신의 책을 받아 보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의 체계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천구 개념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신플라톤주의의 영향 때문에 원운동이 가장 완전한 운동이라고 생각하여 천구들이 원운동만을 한다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원운동을 고수하기 위해 작은 원들을 많이 도입해야만 했으며, 결과적으로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 체계와 마찬가지로 복잡해졌습니다. 또한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면 시차가 발생하게 되는데, 그 시대에는 이러한 시차가 관측되지 않았습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이렇게 시차가 관측되지 않는 이유를 우주가 매우 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는데, 시차를 확인할 수 있어야 지동설이 확실하게 입증된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결국 시차의 관측은 19세기 독일의 천문학자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베셀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티코 브라헤
코페르니쿠스의 뒤를 잇는 사람으로는 티코 브라헤를 들 수 있습니다. 티코 브라헤 (Tycho Brahe, 1546 ~ 1601) 는 덴마크의 천문학자로, 천체관측 분야에 있어서 엄청난 업적들을 남겼습니다. 1576년에 그는 프레데리크 왕의 지원을 받아 덴마크의 벤 섬에 우라니보르 천문대를 지었고, 여기에서 정밀한 관측들을 계속하여 방대한 양의 자료들을 축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수학적인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획기적인 우주 체계를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제시한 우주 체계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와 태양 중심의 체계를 혼합한 것에 그쳤습니다. 결국 그는 수학적인 완성을 위해 요하네스 케플러를 초빙하여 공동 작업을 시작하려고 했으나 갑작스럽게 죽었고, 그의 귀중한 관측 자료들은 케플러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요하네스 케플러
요하네스 케플러 (Johannes Kepler, 1571 ~ 1630) 는 독일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로, 근대 천문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업적들을 남겼습니다. 대표적으로 그가 제안한 케플러 행성운동 법칙은 아이작 뉴튼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확립했을 때에 중요한 기초가 되었습니다.
케플러는 원래 성직자가 되려고 했었고, 나중에 천문학 연구를 하면서도 그것이 신의 섭리를 발견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독실한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는 성직자가 되기 위해 독일 튀빙겐 대학에 입학하여 교양학부를 마치고 신학부에 입학하였는데, 신플라톤주의와 쿠자누스의 기하학적 신비주의, 코페르니쿠스의 우주 체계 등을 접하면서 천문학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의 글 곳곳에서 신비주의적 성향이 나타나는 것도 대학 시절에 받은 영향을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케플러는 1596년에 『Mysterium Cosmographicum』 (우주의 신비) 라는 책을 발표하면서 천문학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이 책은 그 제목처럼 우주의 신비에 대해 사변적인 논의를 통해 설명하고 있는데, '왜 우주에는 여섯 개의 행성만 존재하는가?', '신은 왜 여섯 개의 행성을 창조했는가?' 같은 질문들에서 출발합니다.[6]이 문제에 대해 그는 정다면체가 5개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설명했는데, 행성이 여섯 개인 경우에 행성 사이에 정다면체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정확히 다섯 개가 나온다는 결론을 도출했습니다. 이처럼 그는 굉장히 신비주의적인 생각들을 했으며 그것들을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기법들을 사용하였으나 그런 논의에 머물러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1600년에 케플러는 티코 브라헤의 초청으로 프라하에 가서 화성의 궤도를 계산하는 일에 착수합니다. 천체관측의 거장과 탁월한 수학적 재능을 가진 두 사람의 공동 작업이었기 때문에 정말 역사적인 일이 되었으나, 1년 후에 티코 브라헤가 갑작스럽게 죽으면서 둘의 공동 작업은 무산되었습니다. 이후에 티코가 남긴 관측 자료들은 케플러에게 넘어갔고, 그는 이것을 바탕으로 약 5년 가량 화성의 궤도를 설명하기 위한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케플러 제1법칙 - '행성은 태양을 한 초점으로 하는 타원궤도를 그리면서 공전한다'는 사실과 제2법칙 - '행성과 태양을 연결하는 가상의 선분이 같은 시간 동안 쓸고 지나가는 면적은 항상 같다'는 사실을 밝혀내었습니다. 그는 원운동에 대한 집착을 버림으로써 위대한 발견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케플러 행성운동 법칙 중 마지막 법칙인 제3법칙은 1619년에 『Harmonice Mundi』 (우주의 조화) 라는 책을 통해 발표되었습니다. 이 책에는 우주의 다양한 조화에 대한 법칙들이 나오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케플러 제3법칙입니다. 제3법칙은 '행성의 공전주기의 자승은 궤도의 장반경의 3승에 비례한다'는 내용입니다.
케플러의 행성운동 법칙을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 행성은 태양을 한 초점으로 하는 타원궤도를 그리면서 공전한다.
- 행성과 태양을 연결하는 가상의 선분이 같은 시간 동안 쓸고 지나가는 면적은 항상 같다.
- 행성의 공전주기의 자승은 궤도의 장반경의 3승에 비례한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케플러가 행성운동 법칙을 발견하면서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근대적인 우주 체계로 변할 수 있었으며 천구와 작은 원이 사라지고 원운동에 대한 집착 역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케플러의 저작들은 상당히 어려운 수학적인 증명을 다루는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보다 직접적인 관측이 필요했고, 이탈리아의 물리학자이자 천문학자인 갈릴레오 갈릴레이 (Galileo Galilei, 1564 ~ 1642) 가 이러한 직접적인 관측을 수행했습니다.
갈릴레이는 1609년에 어느 네덜란드인이 망원경이라는 것을 발명했다는 소식과 함께 대략적인 작동 원리를 전해들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작업장에서 직접 30배의 배율을 가진 망원경을 제작합니다. 당시 망원경은 군사적인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었기에 국가의 지도자들에게 많은 주목을 받았는데, 갈릴레이는 이것을 이용하여 하늘의 별이나 행성들을 관찰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으며 곧 최초로 망원경을 사용하여 천체를 관측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늘의 천체들을 망원경으로 보게 된 그는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되는데, 달의 표면이 지표면과 마찬가지로 울퉁불퉁하고 산이나 골짜기 같은 지형도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이 발견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우주 체계에 타격을 가하는 것이 되었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서는 천상이 완전한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달이 그리 완전하게 생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1610년 1월 7일에 갈릴레이는 망원경을 이용하여 목성 주변의 별들이 계속 움직이는 것을 관찰하는데, 1월 10일 되자 그 별들 중 하나가 사라졌습니다. 만약 고정되어 있는 별이라면 이러한 일이 발생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이러한 일들이 관측되는 것은 그 별들이 목성의 주위를 돌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라는 결론을 지었습니다. 현재 이 별들은 목성의 위성인 이오, 유로파, 칼리스토로 확인되었으며, 1610년 1월 13일에 갈릴레이가 발견한 가니메데와 함께 갈릴레이 위성이라고 불립니다.
갈릴레이는 이러한 발견들을 1610년 3월에 『Sidereus Nuncius』 (별들의 소식) 라는 책으로 발표하였습니다. 이것으로 그는 유럽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고, 태양 중심의 우주 체계를 옹호하던 요하네스 케플러 같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그는 천체를 계속 관측하면서 금성의 위상 변화를 발견하였고, 이것은 태양 중심의 우주 체계에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이기에 중요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구를 중심에 놓고 나서 행성들이 배열된 순서를 바꾸고 궤도도 좀 수정하면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태양 중심의 우주 체계가 맞다는 것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결정적인 증거는 이후 19세기에 이루어진 시차의 관측이었습니다.
『Sidereus Nuncius』가 큰 반향을 일으키며 명성이 유럽 전역으로 퍼졌고, 요하네스 케플러의 지지를 받게 되었으나 이때부터 갈릴레이에게는 고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평소에 다소 공격적인 성향이었기 때문에 많은 정적이 있었는데, 이들은 갈릴레이와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함께 비난하는 글들을 발표했고 그것의 영향으로 1616년에 교황청에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 우주 체계를 가르쳐서도 안되고 변호해서도 안된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1623년, 갈릴레이와 가까운 사이였던 바르베리니 (Maffeo Barberini) 추기경이 교황이 되었는데, 갈릴레이는 이를 이용하여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대한 금지령을 풀기 위해 교황청을 방문하였습니다. 교황은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러한 담론에서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해서는 안된다는 결정을 했습니다. 갈릴레이는 어느 편을 들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중재자를 추가시키고 대화체 문장을 사용하여 마치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나온 책이 바로 1632년에 출판된 『Dialogo sopra i due massimi sistemi del mondo』 (두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 입니다. 이 책에는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 우주 체계를 지지하는 심플리치오와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지지하는 살비아티, 중재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사그레도가 등장하여 우주 체계에 대한 논쟁을 벌이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Dialogo sopra i due massimi sistemi del mondo』는 중립적인 입장에서 두 체계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훨씬 더 합당하다는 시각이 기저에 깔려 있어서 읽는 사람들이 모두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옳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게다가 라틴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로 저술되었기에 학자뿐만 아니라 일반인들 역시 쉽게 읽을 수 있었기에 교황청에서는 1634년에 갈릴레이를 소환하여 종교재판을 합니다. 종교재판에서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공개적으로 거부한다는 선언을 하여 목숨을 건졌으나 죽을 때까지 가택연금 상태에 놓였습니다.
이후, 갈릴레이 사후 350년이 되는 1992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당시의 재판이 잘못된 것임을 인정하고 갈릴레이에게 공식적인 사죄를 하였습니다.
생리학 혁명
생리학 혁명은 고대부터 인정되어 오던 갈레노스의 생리학 이론 체계가 윌리엄 하비가 제안한 혈액의 순환이론에 기초한 것으로 바뀐 사건을 뜻합니다. 그리 큰 변혁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인체 내부의 움직임을 정량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동시대의 천문학 혁명 등과 비슷한 중요도를 가지는 것으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갈레노스의 생리학 이론
그리스의 학자들은 생물체가 자신의 본질에 따라 성장, 운동, 사고의 원리라는 세 가지 원리 중 한 가지나 그 이상의 원리를 담지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컨대 식물은 자라기는 하지만 이동하지 않기에 성장의 원리를 가지고 있으며 동물은 자라면서 이동도 하기 때문에 성장과 운동의 원리를 가지고 있고, 인간의 경우에는 사고도 할 수 있기 때문에 세 원리를 모두 가지고 있다는 식입니다. 또한 성장, 운동, 사고라는 세 가지의 작용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세 가지의 영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세 가지 영은 각각 자연의 영, 생명의 영, 정신의 영입니다.
로마의 의학자 클라우디우스 갈레노스 (Claudius Galenus) 는 이러한 세 가지 작용을 인체의 소화, 호흡, 신경 체계와 관련된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즉, 소화작용은 성장의 원인인 자연의 영, 호흡은 운동의 원인인 생명의 영, 신경은 사고작용의 원인인 정신의 영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갈레노스는 정맥과 동맥을 독립적인 체계로 구분하여 서로 다른 작용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컨대 정맥의 피는 우리가 섭취한 음식물이 간에서 변형되면서 만들어지는데, 이는 성장의 원인인 자연의 영을 가지고 있으며 순환하지 않고 인체의 각 부분으로 이동하여 성장하는 데에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갈레노스의 이론에 의하면 우리가 섭취한 음식물은 위에서 액체로 변하게 되며, 이 액체는 위와 소장을 통해 흡수되면서 간으로 이동합니다. 간에서 액체가 피로 바뀌면서 피는 정맥을 통해 신체의 각 부분으로 흘러갑니다. 또한 정맥의 피는 우심실로도 가며, 그곳에서 피의 일부가 폐동맥을 통해 폐로 가고 또 다른 피들은 심장격막을 통해 좌심실로 전달됩니다. 좌심실로 전달된 정맥의 피는 폐정맥을 통해 전달된 공기와 섞여서 생명의 영이 되고, 생명의 영 중 일부는 동맥을 통해 뇌가 있는 쪽으로 흘러갑니다. 뇌에서 생명의 영은 정신의 영으로 변형되어 신경 체계를 통해 전신으로 공급됩니다. 이러한 이론을 통해 성장이나 호흡 등의 생리적 현상을 보다 상세하게 설명할 수 있었으며, 이 점 때문에 갈레노스의 이론은 심장을 중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리학 이론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의 이론은 수많은 해부를 통한 관찰에 근거하였으나 두 가지의 중대한 오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심장격막에 구멍이 있다는 주장과 폐와 심장을 연결하는 폐정맥이 공기로 가득 차있다는 주장입니다. 물론 갈레노스를 추종했던 르네상스 시대의 생리학자들이 이 지점에 대해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던 중에 그의 이론을 대체할 만한 새로운 이론을 만들 수 있게 되었던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생리학자들
중세 시대에 갈레노스의 이론이 아랍 세계를 통해 유럽에 전해졌으며 중세 대학의 의학부에서 해부가 성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갈레노스의 오류에 대해서는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는 중세 의학자들이 새로운 발견과 연구보다 갈레노스의 저작들을 요약하고 새롭게 편찬하는 데에 더욱 큰 관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시 유럽에 소개된 갈레노스의 저작들 중에서 생리학이나 해부학에 관련된 것은 거의 없었으며 주로 질병의 원인과 치료법에 관한 아랍어 판본이 번역된 것이기에 그의 이론이 가지고 있는 오류들이 쉽게 드러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원전을 중시하는 경향과 함께 갈레노스의 저작 대부분이 라틴어로 편찬되면서 그의 해부학 이론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당대의 의학자들은 갈레노스의 해부학 이론을 상세하게 연구하기 시작하였으며 여러 가지 오류와 그에 대한 수정이 시도되었습니다.
베살리우스
해부학자이자 의사인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 (Andreas Vesalius, 1514 ~ 1564) 는 파리 대학의 의학부에 입학하였다가 이탈리아의 파도바 대학으로 가서 우수한 성적으로 학위 시험을 통과하여 23세의 나이로 해부학과 외과 교수가 되었습니다. 이전부터 해부학 교수는 높은 의자에 앉아서 교과서를 바탕으로 설명하는 일만 했으나, 베살리우스는 직접 집도하면서 학생들에게 자신의 이론을 가르쳤습니다. 또한 강당에 인체해부도를 게시하여 학생들의 이해를 도왔는데, 덕분에 학생들이 그의 강의를 매우 좋아했습니다.
심장을 직접 해부한 결과, 갈레노스의 이론과는 다르게 심장 격막에 구멍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으며 이 사실을 1543년에 출판된 그의 저서 『De humani corporis fabrica』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 에 발표하였습니다. 이 책은 해부학의 혁신을 가져왔는데, 서문에서부터 갈레노스를 숭배하는 의학계의 경향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베살리우스는 심장 격막의 구멍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피가 우심실에서 좌심실로 전달되는 것 역시 관찰할 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피는 어떻게 우심실에서 좌심실로 가는지에 대해 밝혀야 하는데, 그는 여기에 대한 답을 생각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얼마 후에 밝혀진 사실―우심실의 피가 폐를 거쳐서 좌심실로 간다는 사실―에 따라 해결되었습니다.
파브리키우스
파도바 대학의 히에로니무스 파브리키우스 (Hieronymus Fabricius, 1537 ~ 1619) 는 해부를 통해 정맥에 판막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현대에는 이 판막이 피의 역류를 방지하기 위해 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 당시의 파브리키우스는 정맥 판막이 정맥에 흐르는 피의 속도를 늦추어서 신체의 각 부분에 영양분을 골고루 공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결국에는 그 역시 갈레노스의 생리학 이론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비와 혈액 순환의 발견
윌리엄 하비 (William Harvey, 1578 ~ 1657) 는 1578년에 영국 켄트 주의 포크스턴에서 태어났습니다. 1593년에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 교양학부에 입학하여 4년 간 여러 학문과 철학을 공부했고, 교양학부를 졸업한 후에는 당대 의학의 중심지였던 파도바 대학으로 갔습니다. 당시 파도바 대학에서는 인체 해부를 중심으로 하는 의학 교육이 이루어졌는데, 처형된 범죄자들의 사체를 기증받아서 해부를 진행했던 것입니다. 당시 인체 해부 강의는 매우 높은 인기를 가지고 있어서 강의실이 항상 만원이었으며, 해부 시범을 할 때에는 교수의 지시에 따라 조수가 해부대에 놓인 시체를 해부하여 내장들을 꺼내서 보여주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하비는 파도바 대학에서 이후 그의 연구에 큰 영향을 주게 되는 사람인 히에로니무스 파브리키우스를 만났습니다. 파브리키우스는 1565년부터 1613년까지 파도바 대학에서 해부학을 가르쳤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구 방식을 따르면서 연구를 수행하는 것이 특징적이었습니다. 그는 여러 동물을 해부하여 내부 기관들을 서로 비교하거나 심장의 작동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였는데, 하비는 그에게서 이러한 영향을 받았던 것입니다.
1602년, 파도바 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하비는 영국으로 돌아와서 런던에 병원을 개업하여 많은 부와 명예를 얻었고, 1615년에는 런던의 왕립 의과대학 교수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렇게 유명 인사가 되면서 1618년부터 영국 국왕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의 시의로 일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의사로서 명성을 날리는 한편으로는 해부 연구를 끊임없이 수행하였습니다. 연구에 있어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으며 혼자 수행했고, 주요한 연구과제는 심장과 동맥의 운동과 맥박이었습니다.
하비는 많은 종류의 동물들을 살아 있는 상태에서 해부하였는데, 특히 심장박동이 느리기에 관찰하기 쉬운 냉혈동물의 심장을 주로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대정맥을 통해 우심실로 들어간 피가 폐동맥을 통해 모두 폐로 들어가고, 폐를 통과한 후에는 좌심실로 전달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심실에 판막이 있어서 이것이 피가 역류하는 것을 방지한다는 사실도 발견했습니다. 또한, 폐를 통해 좌심실로 들어간 피는 심장의 수축에 따라 대동맥을 통해 동맥계로 흘러간다는 사실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발견들을 종합하여 사변적인 추론들을 하였고, 피가 정맥을 통해서 심장 쪽으로 들어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에 걸쳐 계속 흐른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이 결론을 통해 각 심실 입구에 있는 판막들은 피가 들어온 곳으로 다시 나가지 못하도록 되어 있으며, 출구 쪽의 판막들은 나간 피가 다시 들어오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비의 실험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줄을 이용한 실험인데, 이 실험에서는 실험자가 자신의 팔에 줄을 묶어 정맥과 동맥의 흐름을 차단합니다. 이때, 실험자는 묶은 부분의 위쪽에서 동맥이 부어오르는 것을 관찰할 수 있으며 정맥을 묶은 것은 그대로 둔 채 동맥을 묶은 것만 풀어주면 동맥을 통해 따듯한 피가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정맥은 줄로 묶인 부분의 아래쪽에서 부풀어오르는데, 동맥을 통해 피가 계속 내려가지만 정맥으로 넘어간 피는 위로 올라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실험으로는 철사를 이용한 것이 있는데, 혈관에 가는 철사를 집어넣을 때 어느 한쪽 방향으로 넣어야만 잘 들어간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혈관 내의 피는 어느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비는 생리학에 정량적 계산을 처음으로 도입하여 혈액의 양을 측정했는데, 심장에서 밀려나가는 혈액의 양이 한 시간에 체중의 3배에 달한다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즉, 이렇게 많은 양의 혈액이 한 시간 내에 정맥의 말단 부위에서 만들어졌다가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혈액이 신체 내부를 계속해서 순환한다고 설명하는 것이 더 합리적입니다. 그의 이러한 계산은 심실이 함유하는 혈액의 양을 2온스로 잡은 다음, 1분에 심장이 72회 박동한다고 놓고 계산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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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라크에서 발견된 '플림튼 322' (Plimpton 322) 라는 점토판에는 쐐기 문자로 피타고라스 수가 적혀 있는데, 이는 BC 1800년대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물론 수학적인 정리의 형태는 아니었으며, 경험적으로 알아낸 삼각형 변의 길이의 특정한 경우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 ↑ 물은 정20면체, 불은 정4면체, 흙은 정6면체, 공기는 정8면체에 대응됩니다.
- ↑ 근대 과학혁명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아이작 뉴튼이 대학을 다닐 때인 17세기 중엽에도 유럽 각지의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을 주된 교과목으로 선택하고 있었을 정도입니다.
- ↑ 불이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며 공기가 그 아래에 있고 그 아래에 물이 있으며 제일 아래에는 흙이 있다는 것이 그가 생각한 고유한 위치입니다.
- ↑ 커다란 천구의 운동보다 훨씬 작은 규모인 지구의 운동을 통해 천체 현상을 설명하는 편을 선호하는 것은 이후에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생각에서도 보입니다.
- ↑ 현대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상당히 웃긴 질문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케플러의 시대에서 이러한 생각은 특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