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아프리카의 북동쪽에 있는 나라이자 아시아의 시나이 반도도 차지하고 있는 나라이다. 이집트는 서쪽으로는 리비아, 남쪽으로는 수단, 동쪽으로는 시나이 반도로 이스라엘과 접경하고 있다. 이집트의 동북쪽의 나일 강 삼각주 유역에 수도인 카이로가 있다. 흔히 파라오나 피라미드로 유명한 곳이다. 시나이 반도와 이집트 본토 사이에는 수에즈 운하가 있어 홍해와 지중해 사이를 오가는 배들이 많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이집트는 이라크, 이란, 인도, 중국과 함께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 중 하나이다.
고대 이집트[편집 | 원본 편집]
오아시스 하나 없고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사막 기후 특성상 우간다, 에티오피아 등에서 발원하는 나일 강 수계를 기반으로 문명이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수단 - 이집트 국경의 와디 할파에서 발견된 이동식 가옥의 흔적은 구석기 시대인들이 나일 강 수계를 따라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오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나일 강은 탄자니아-케냐-우간다 국경의 빅토리아 호에서 시작되는 화이트 나일과 에티오피아에서 발원하는 블루 나일의 두 지류가 있는데, 이 두 지류 덕분에 사하라 사막이 확장되건 어쨌건 마를 생각을 안 하는 위엄 쩌는(...) 강이었다. 결과적으로 물 따라 물 마시는 동물 따라 나일 강에 유입된 인류는 마르지 않는 하천과 하천의 범람으로 인해 퇴적되는 비옥한 충적토를 기반으로 정주생활을 영위하였고, 과장 좀 섞어서 씨 뿌리고 적당히 잡초만 뽑으면 알아서 먹을 게 자라는 개꿀을 누렸다. 여기가 가나안 입니까?
이 시기 이집트인의 세력은 파이윰 ~ 마아디 문명의 하 이집트와 타샨 ~ 나카다 문명의 상 이집트로 나뉘며 양자는 각자 독자적인 사회를 형성하고 대립하였으나, 세계지리 공부하면 꼭 나오는 나일 강 삼각주로 대표되는 비옥한 평야 지대를 영위하던 하 이집트가 우월한 농업 생산력을 바탕으로 상 이집트에 비해 우위를 점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기원전 3천년 경을 기점으로 양자의 관계가 급변하는데, 나카다 제 3문명의 상 이집트가 하 이집트를 복속시키고 이집트를 통일하기에 이른다. 양자의 형세가 역전되는 이유는 아직도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논쟁의 여지가 있어 확실히 설명하기 어려우나, 이 시기 상 이집트에서 발견되는 초기 신성 문자, 왕가의 영묘와 세레크[1]를 통해 상 이집트가 하 이집트에 비해 보다 수직적인 사회 재편을 이룩하여 고대 국가에 가까워졌으며, 관개 시설의 흔적이 남아 있어 농업 생산력의 차이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으리라고 본다.[2]
이후 나르메르가 제1 왕조를 건국하여 왕조 시대를 열며, 이 때부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집트 문명의 모습이 나타난다.
로마 제국 치하 시대[편집 | 원본 편집]
그러다가 알렉산드르 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하고 그 부하였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마지막 이집트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열면서 헬라 문화와 이집트 문화가 결합되어 이집트는 더욱 강한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발흥 후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큰 위기에 빠졌다. 우선 프톨레마이오스 4세 시대부터 시작된 비리와 권력 투쟁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쇠퇴시켰기 때문에 힘이 약해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사실상 마지막 파라오였던 클레오파트라 7세는 로마 공화국과 동맹을 맺었다. 처음에는 카이사르와의 밀월관계를 유지했고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뒤 안토니우스와 협력했으나 로마 제국에서 안토니우스의 라이벌이자 카이사르의 후계자였던 옥타비아누스[3] 지지층의 힘이 너무 커져서 결국 이집트는 옥타비아누스의 군대에 대한 침입을 받게 된다. 두 세력이 맞붙은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했다면 이 위기가 불식될 수 있었으나 전투는 결국 옥타비아누스의 승리로 돌아가고 클레오파트라 7세는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가 거기서 자살하게 되며 고대 이집트는 멸망하고 로마의 속주가 된다.
그 이후 이스라엘 및 로마 전 지역에서 박해를 피해 건너온 기독교도들 덕분에 이집트는 순식간에 알렉산드리아 교회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국가로 빠르게 바뀌었고 이 시대의 흔적은 2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콥트어 및 콥트 교회에 남아있다.
중세[편집 | 원본 편집]
그 이후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이집트는 로마제국 중앙정부와는 별개의 독립성을 가지고 번영했으나, 동로마제국 시대가 시작될 때부터 중앙정부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그래서 641년 침입해온 초대 이슬람 제국에게 자신들에 대한 통치권을 스스로 넘겼는데, 이 치명적 실수로 인해 동로마제국은 쇠퇴하기 시작하고 이집트 및 북아프리카의 이슬람화가 시작된다. 초기에는 어느 정도 무슬림과 기독교 신자 간의 균형이 있었으나 십자군 전쟁의 후유증으로 인한 무슬림들의 기독교 탄압이 이루어지고 점점 무슬림 인구가 많아지면서 알렉산드리아의 콥트 기독교는 쇠퇴하게 된다.
그리고 왕조가 여러 번 바뀌면서 맘루크 왕조의 시대까지 평범한 이슬람 국가로 남는가 했는데...
근대[편집 | 원본 편집]
맘루크 왕조가 망하고 오스만 제국 산하 초대 이집트 총독으로 임명된 메흐메트 알리 파샤는 수에즈 운하를 파려고 프랑스와 협력하였으나 영국 정부의 방해로 갖은 고생을 한 끝에 수에즈 운하를 완공하였다. 그러나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해 스폰서를 잃고 수에즈 운하 운영권에 대한 남은 주식마저 재정 악화로 인해 영국에 매각하게 되자 이때부터 이집트 내에 대영제국 천하가 열리면서 사실상 영국의 반식민지가 된다.
현대[편집 | 원본 편집]
가말 압델 나세르가 무함마드 알리 왕조를 몰아내고 군사 정권을 세운다. 이후 시나이 전쟁을 치른 뒤 급사하면서 안와르 사다트가 정권을 이어받는다. 그 역시 처음에는 이스라엘에 대해 적대 정책을 펼쳤으나, 이후 입장을 바꾸어 1978년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체결하면서 시나이 반도를 돌려받는 대신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곧 반대자들에 의해 1981년 행사 참여 중 암살당하고 호스니 무바라크가 이어받는다.
무바라크는 1981년부터 2011년까지 약 30년 동안 독재를 하다 아랍의 봄 혁명이 일어나면서 하야한다. 그 뒤 일어난 이집트 최초의 민주적 대통령 선거로 무함마드 모르시가 취임하나 그에 대한 비판이 잇따르던 중 1년도 안 되어 군사 쿠데타로 축출되고 현직 대통령인 압둘 파타 알시시가 취임하였다.
지리[편집 | 원본 편집]
서부의 사막 지대와 동부의 나일 강 유역의 지형 및 기후가 완전히 다르다.
기후는 고대에는 흔한 지중해의 온난한 기후를 가지고 있었으나 사막화 현상이 동쪽으로 확장되면서 이미 대부분의 고대 이집트 유산은 사막에 위치해 있을 정도로 사막화가 심각하다.
그리고 동부 나일강 유역도 아스완 댐의 건설로 인해 전통적이고 주기적인 강물 범람으로 인한 토지 양분 보충 매커니즘이 사라지면서 농사가 가능한 지역이 줄고 있다.
정치[편집 | 원본 편집]
외교[편집 | 원본 편집]
행정구역[편집 | 원본 편집]
경제[편집 | 원본 편집]
도시[편집 | 원본 편집]
카이로-수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