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위키 n자 기여제

큰숲백과, 나무를 보지 말고 큰 숲을 보라.

우왕! 나도 사면할래!

장자바오 산사나무 월량도, 사면을 노리며

나무위키 n자 기여제남간에서 n자 이상을 작성할 경우 사면해주는 제도이다. 이 제도는 2기 정식 운영진의 호민관 중 한명이 만든 제도로 반달들을 사면시키기 위해서 만들어진 제도였으며 실제로도 효과가 어느정도 있었으나 그뒤 나무위키 대숙청 사건의 운영진들과 위의 장자바오 산사나무 월량도의 츄잉새끼까지 덩달아 사면을 요청하면서 결국 그 호민관은 사퇴를 하였고 현재는 제도가 어느정도 수정되었다고 한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맨 초기 이 제도를 계획했던 호민관 C는 영구차단된 사용자들의 진정성 확인을 위해 n자 기여제를 도입했다. 이 n자 기여제를 통해 반달러들의 사면이 이루어지고 그렇게 사면된 반달러들이 정상적인 위키니트화가 되면서 이 제도의 효과가 점점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제도의 성공적 도입으로 다른 호민관이 다중이를 대량으로 생성하던 반달 등의 반달러들에게 사면의 기회를 주어 그들에게 새로운 인생의 길이 열리나 했다...

만일 여기서 끝났다면 이 제도가 여기에 작성될 일도 없었다.

이 제도로 인해 개나소나 다 n자만 기여하면 다 사면을 받는다고 하자 츄잉,1기 운영진 등의 엄청난 논란을 일으킨 사람들까지 사면을 요청한 것이다. 당연히 논란이 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긴급회의를 열었는데 위쪽에 말했던 호민관C는 위키갤러리에서 이런 발언을 하면서 죽창만 먹고 회의에 참여하지 않아 결국 사퇴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회의를 통해 앞으로 사용자들과 운영진들이 협의를 하여서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반달만 이 제도를 적용할 수 있다고 법을 바꾸었다.

개념[편집 | 원본 편집]

일단 이 제도 자체에 대해서는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다. 나무위키의 정책상 사용자들의 차단기간을 조정할 수 있었던 호민관이 이 제도를 제안해 실행했고 위키의 규모 상 당연히 영구차단된 반달이 많은 나무위키에서 결과적으로 반달이 정상적인 기여를 하면서 위키의 질을 보다 더 높일 수 있고 반달 역시 착한 기여를 할 터닝포인트가 되며 거기에다 호민관들이 n자 기여에 대해 공정하게 평가하는 것까지 보면 그다지 나쁜 제도가 아니고 모범적인 제도로 남았으며 이 위키에 항목이 작성되는 일도 없었을 만큼의 훌륭한 제도였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다시피 이 제도는 기준이 없었고 이를 통해 츄잉이나 유니폴리 같은 반달역시 이 제도의 약점을 파악하고 사면을 노릴 수도 있기 때문에 개나소나 이 제도를 활용하는 것은 영구차단을 무효화 할 수도 있고 아예 모든 죄가 사면되어서 반달이라 할 수 도 없었던 심각한 오류가 있었다. 결국 이로 인해 아까 말한 호민관 C가 사퇴하는 등의 문제가 있었었다. 만일 이런 사면제도를 만들 경우 적당한 장치를 마련하여 운영해야 하는데 그런 장치가 없었다는 것은 사실상 영구차단을 없애는 일이나 다름 없었고 때문에 이 제도는 사면제도를 만들때에는 어느정도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반면교사가 될 수 있다고 본다.

n자 작성[편집 | 원본 편집]

n자 작성에 대해서는 거의 대부분의 사용자들의 형벌에 따라 기준이 달라지는데 보통은 한 3만자 정도 하는 것 같다. 혹시나 이 제도로 사면받고 싶어하는 사용자들을 위해서 팁을 몇가지 알려주려고 한다.

복붙은 하지 말자[편집 | 원본 편집]

가능하면 복붙은 하지 않는것이 좋다. 가령 이런 예시가 있다.

켐퍼의 어머니는 아들을 끊임없이 멸시하였다. 그녀는 아들의 외모와 이상한 성격을 계속하여 트집을 잡았다. 끊임없이 거부당하며 굴욕을 당하는 분위기 속에서 자란 켐퍼는 극식한 자기혐오에 빠진다. 또한 자신에게 호통을 치는 어머니에게 증오심을 품어나간다. 어머니에 대한 원한은 곧 세상의 불특정 여성 전체에 대해서까지 확대되었다 에드먼드 켐퍼는 초등학교 유년시절에 이미 극심한 정서불안증을 나타낸다. 다른 보통의 아이들이 슈퍼맨 따위의 흉내를 내며 놀 때, 어린 켐퍼는 가스실에서 처형되는 사람의 모습을 따라하곤 했다. 하루는 켐퍼가 2학년 때 여선생님을 좋아하는 것을 알아챈 친구가 가서 키스를 해보라고 놀렸다. 그러자 "키스를 하려면 먼저 죽여야 돼"라고 어린 켐퍼가 대답했다. 자신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줄 수 있는 여성은 죽은 여성뿐이라는 생각이 어린 켐퍼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같은 믿음은 갈수록 커져갔다. 다른 대부분의 연쇄살인범처럼 에드먼드 켐퍼도 아주 어릴 때부터 가학적인 성향을 보였다. 처음에 그는 여동생이 가진 인형을 해체하며 흡촉해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애완동물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켐퍼는 벌목에 쓰이는 칼로 이웃집 애완용 고양이의 목을 절단했고, 또 산 채로 땅에 묻는 경우도 있었다. 10대 초반에 그는 온 동네 사람들을 죽여 그들의 시체와 성교하는 상상을 하며 자위를 하기도 했다.

- [1]

열 살의 나이일 때, 학교에서 돌아온 캠퍼는 자기 짐들이 지하실로 옮겨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날 이후 매일 밤을 창문도 없는 컴컴한 지하실에서 혼자 잠을 자야했다. 이것은 우연하게 잠시 집에 들렀던 아버지가 크라넬의 행동을 말려, 그 일을 못하게 할 때까지 여덟 달 동안 지속되었다.

에드 캠퍼의 인생에 적잖이 영향을 미쳐을 이때의 일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정리가 되지 않은 것 같다. 보는 글마다 그에 대한 해석이 엇갈릴 정도로 여러 가지 설들이 난무하고 있다.

그 여러 가지 설 중에 우선 강한 남자에 관한 것이 있다. 부모의 이혼 후, 에드는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남에게 의존하려 하는 나약한 성격을 갖게 되었다. 어머니 크라넬은 자기 아들인 에드가 동성애자로 자라날 것을 두려워했다. 이에 자기 아들을 좀 더 강인하게 키워야 할 필요성을 느낀 그녀가 에드 켐퍼를 매일 밤 지하실에서 자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반대로 사내로 불려지길 원했던 에드 캠퍼가 좀 더 터프해지기 위해 자기 어머니에게 자신을 지하실에 가둘 것을 요구 했고, 크라넬이 그의 뜻대로 지하실에 가두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단지 여자 형제들의 이기적인 욕심 탓이라는 이야기도 보인다. 그의 오만한 어머니와 여자 형제들은 그를 얕잡아 보았고, 그가 좀 더 자라게 되자, 같이 쓰고 있던 그가 차지하고 있던 부분을 차지하기 위해 그를 지하실로 쫓아 보냈다는 것이다.

아무튼, 명확한 것은 어머니가 아들을 지하실로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그 일은 정상적인 부모의 행동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크라넬의 행동은 당연했었다는 글도 보인다. 그것에 대한 이유로, 크라넬이 자기 아들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었고, 자기 딸들을 자기 아들에게서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었는데, 그만큼, 에드 켐퍼는 위험한 아이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2]

1963년 겨울 15세의 에드먼드 켐퍼는 그의 조부모가 사는 캘리포니아 주 노스포크의 목장으로 보내지게 된다. 이듬해 8월, 할머니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 켐퍼는 22구경 권총을 할머니의 머리에 들이댔다. 그는 할머니를 쏜 후 칼로 난자했고, 피 흘리는 시체를 침실까지 끌고 갔다. 잠시 후 , 나갔다 돌아오던 할아버지는 문을 열고 들어오다 켐퍼의 총에 맞아 죽었다. 켐퍼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태연히 알렸고, 경찰이 올 때까지 앉아서 기다렸다. 살해 동기를 묻는 경찰의 질문에 켐퍼는 '할머니를 죽이면 어떤 기분일지 궁금했다'라고 대답한다. 할아버지까지 죽인 이유는 자비를 베풀기 위해서였다고 대답했다. 아내에게 일어난 일을 알고서 슬퍼하게 될 노인의 고통을 덜어주려 했다는 것이었다. 16세밖에 되지 않았던 그는 편집증적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았으며, 어태스케이드로 주립병원에 수용된다. 그안의 병동에서 켐퍼는 지난날을 그리워하는 연쇄강간범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는 이제 강간에 대한 환상까지 키워갔다. 의사들 앞에서 켐퍼는 음흉한 상상들을 숨기며 온순한 척 연기를 했다. 종교생활을 하며 잘못을 뉘우치는 척 한 덕분에 5년만에 가석방을 얻어낸다. 그러나 가석방 위언회는 어리석게도 의사의 조언과 켐퍼 자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를 어머니의 보호 아래에 있도록 조치한다(...). 켐퍼는 집으로 돌아온 뒤 어떠한 상담도, 정신치료도 받지 않는다.

- [3]

1972년 9월 켐퍼는 주에서 지정한 정신과 의사에게 정신감정을 받았다. 의사는 그의 상태가 호전되었다고 판단했으며, 병이 다 나았다는 보고서를 작성해 유년범죄 기록을 봉해버린다. 의사와의 면담이 끝난 후 켐퍼는 차를 몰고 산타크루즈 산악지대로 향한다. 그의 차 트렁크에는 15세 히치하이커의 머리가 들어있었는데 바로 하루 전날 강간하고 토막낸 여성의 시체였다. 죽은 여성은 '에이코 구'[* 한국계 미국인]였다. 이 소녀는 완치 판정을 받은 켐퍼의 세 번째 희생자였다. 첫번째, 두 번째 희생자는 프레스노 대학에 다니던 18세 여성 '메리 앤 페스체' 와 '애니타 루체사' 였다. 켐퍼는 정신 감정을 받기 훨씬 전인 5월에 이들을 납치했고 외딴 길로 끌고 가서 칼로 난자해 죽였다. 그 다음 시체를 트렁크에 싣고 집으로 가져가 자신의 침실에서 은밀한 파티도 벌였다. 켐퍼는 시체를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찍은 다음, 사지를 절단하고 내장을 꺼낸 후 섹스를 했다. 켐퍼는 시체를 도로 싣고 나와 산악지대에 하나씩 내다버렸다. 그리곤 머리를 골짜기에 굴려 처박았다. 6명의 여자들이 이와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켐퍼는 어린 시절부터 꿈꾸어온 시체 간음을 하며 희열을 맛보았고, 특히 항문 성교와 목을 절단하는 것으로 크나큰 기쁨을 맛본다. 그는 적어도 두 명의 인육을 먹었으며, 피해자의 다리에서 잘라낸 살점으로 마카로니 요리 따위를 만들기도 했다. 한편 피해 여성의 치아, 머리카락, 피부 조각은 기념물로 간직하였다. 훗날 정신과 의사들은 이 피해여성들이 실은 켐퍼가 진정으로 증오했던 어머니의 대리인이라고 분석한다. 그가 어머니를 죽일 당시 광기의 절정에 달해 있었다는 것이 그러한 주장을 입증해 준다.

- [4]

1973년 부활절 하루 전날 새벽에 켐퍼는 어머니의 침실에 망치와 칼을 들고 들어갔다. 그리고 어머니의 머리로 망치로 내려친 후 칼로 목을 그었다. 그는 시체를 강간한 뒤 머리를 잘라냈다. 켐퍼의 행동에서 더욱 상징적 의미가 있는 건, 어머니의 목구멍 안에 쓰레기를 채워 넣은 것. 쓰레기는 금방 튕겨져 나와 그의 얼굴을 때렸다. '수십 년 동안 나한테 불평을 늘어놓고 고함을 지르고 명령을 해댔으니 그렇게 당해도 싸죠' 라고 훗날 경찰에세 말한다. 그는 또 어머니의 절단된 머리를 벽난로 벽돌에다 고정해놓고 다트 표적으로 썼다. 그날 오후 늦은 시각 그는 자신의 어머니와 가장 친한 친구를 식사에 초대했다. 그녀가 도착한 후 그녀의 목을 졸라 죽였고 시체를 침대로 가져가 밤새도록 능욕하였다. 다음날 부활절 아침, 켐퍼는 동쪽 방면 콜로라도 주 푸에블로를 향해 쉬지 않고 차를 몰았다. 도착한 뒤에 더는 달아날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경찰에 전화해 자수하게 된다. 경찰은 처음엔 켐퍼의 말을 믿지 않았다. 다른 연쇄살인범처럼, 켐퍼 역시 산타크루스 경찰국의 사람들과 아는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켐퍼는 경찰을 설득, 결국 자신의 집에 보냈다. 그는 이후 공중전화부스에서 자신을 잡으러 올 때까지 기다렸다. 켐퍼는 경찰에게 사건의 전말을 구역질 날 만큼 자세히 털어놓았다. 재판장에선 그는 법적으로 정상이라는 판정을 받았고, 여덟 건의 살인에 대해 유죄를 선고 받는다. 판사가 그에게 어떤 처벌을 받고 싶은지 물어보자, '고문해서 죽여주세요' 라고 켐퍼는 대답했다 켐퍼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아직까지 감옥에서 갇혀 있다. 그리고 죽음과 함께 가석방 심사를 기다리고 있다.

- [5]

이런 경우에는 호민관이 절대로 사면을 해주지 않는다. 이점은 꼭 명시해야 한다. 참고로 이 예시는 실제로 있었던 예시로 저작권 출처는 아래 블로그 링크를 걸어두었다. 따라서 복붙은 가능한 피하자. 오히려 진정성 있는 기여가 더 사면될 가능성이 높다.

사면 된 후의 행동[편집 | 원본 편집]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참고[편집 | 원본 편집]

  • 이 n자 기여제에 대해서는 딱히 제한이 없고 이메일을 통해 호민관에게 먼저 보여주거나 파일에 작성하거나 아니면 나무위키에 일일이 글을 작성해서 분량을 늘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물론 한방에 그 많은 기여량을 하기는 힘들지만 말이다...
  • 참고로 이 문서의 작성자는 오사위키 서버 폭파 사태 당시 사퇴한 전직 최고관리자 OSA이다. 물론 정식적으로 이 사면제도가 오사위키에 적용된 것은 아니고 OSA 역시 무기한 차단된 사용자가 아니라서 기여를 맘대로 해도 되지만 당시 OSA에 대한 오사위키의 분위키는 좋지 않았고 사실상 Orbit나 다를 바 없었기 때문에 OSA는 자신의 반성을 위해 이런 n자 기여제 방식을 택했다고 한다.
  • 여담이지만 이 문서는 작성자 본인 스스로가 말하길 이 없을수도 있다. 이 부분은 양해바란다.

같이 보기[편집 | 원본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