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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圭原
1941.12.29. ~ 2007.2.2.

개요

오규원 (吳圭原) 은 한국의 시인이자 교육자입니다. 1965년 《현대문학》에 「겨울 나그네」를 발표하여 초회 추천되었고, 1967년에 「우계의 시」가 2회, 1968년에 「몇 개의 현상」이 3회 추천 완료되면서 등단했습니다. '날이미지'로 대표되는 특유의 시 세계로 많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서울예전의 문예창작과 교수를 역임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습니다.

생애

출생과 어린 시절

오규원은 1941년 12월 29일에 경상남도 밀양군 삼랑진읍 용전리 636번지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오규옥(吳圭沃) 으로, 그의 아버지 오인호(吳仁鎬) 와 어머니 고계준(高癸俊) 사이의 6남매 가운데 막내였습니다. 그의 집안은 정미소와 과수원을 경영하는 유복한 집안이었습니다.

1948년에 그는 삼랑진초등학교에 입학하였고, 2년 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의 충무동으로 피난하여 부산 토성국민학교에 잠시 다니다가 돌아왔습니다. 1953년에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1955년에 부산중학교에 입학하여 열정적인 독서를 했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시라는 형태의 글을 쓴 것은 부산중학교 3학년 시절이었습니다.

1958년에 부산사범학교에 입학하였고, 「밤」이라는 작품을 잡지에 투고하여 뽑히자 그것을 계기로 시를 쓰는 것에 몰두했습니다. 1962년에 동아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였고, 1965년에는 군대에 입대하여 의무병으로 근무하였습니다. 근무 중에 『현대문학』 7월호에 「겨울 나그네」를 투고하여 김현승 시인에게 1회 추천을 받았으며, 이때부터 필명을 오규원(吳圭原) 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시인 오규원

1967년에 「우계의 시」를 투고하여 "감성과 지성을 갖춘 신인"이라는 평과 함께 2회 추천이 되었고, 1968년 10월에 「몇 개의 현상」으로 『현대문학』에 3회 완료 추천되어 정식으로 시단에 등단했습니다. 제대 후 여러 곳의 작은 출판사들에서 근무했으며 첫 부인인 이옥의(李玉儀) 와 결혼했습니다. 1969년에 동아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였고 한림출판사 편집부에서 근무했습니다. 이때에 장녀 오원의가 태어났으며, 1970년에 계간 『문학과 지성』에 작품을 재수록하면서 김병익, 김현 등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1971년 10월에 첫 시집인 『분명한 사건』이 한림출판사에서 출간되었으며, 이 해에 태평양화학 홍보실로 직장을 옮겼습니다. 다음 해인 1972년에는 국내 최초 호화 컬러판 잡지 『향장』을 직접 창간했고, 장남 오원민이 태어났습니다. 1973년에 두 번째 시집 『순례』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고, 전봉건 시인의 권유로 『현대시학』에 시평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여러 잡지와 일간 신문에 월평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1975년에 시선집 『사랑의 기교』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고, 1976년에 시론집 『현실과 극기』가 문학과 지성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 1977년에 '문장사'라는 이름으로 출판사를 등록하여 1979년부터 1982년까지 직접 경영하면서 김춘수 전집과 이상 전집을 비롯한 50여 권의 단행본을 출판했습니다.

1978년에 세 번째 시집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가 문학과 지성사에서 출간되었고, 1981년에는 '일상 언어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고 있다'는 평을 받은 네 번째 시집 『이 땅에 씌어지는 抒情詩』가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 같은 해에 잡지 『뿌리 깊은 나무』에 연재했던 만화 비평을 모은 『한국만화의 현실』이 열화당에서 출간되었고, 산문집 『볼펜을 발꾸락에 끼고』가 문예출판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

1982년에 정현종 시인의 소개로 서울예술전문대학(서울예전) 의 문예창작과에 출강했고, 『이 땅에 씌어지는 抒情詩』로 현대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1983년에는 소설가 최인훈의 배려로 서울예전 문예창작과 전임교수로 취임했고, 시론집 『언어와 삶』이 문학과 지성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 1984년에 문예창작 교육의 가능성에서 실제 교육과정까지 국내외의 실제 교육과정과 비교해서 연구한 논문집 『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육과정 연구』가 서울예전 출판부에서 별쇄본으로 발간되었습니다.

1985년에 산문집 『희망 만들며 살기』가 지식산업사에서 출간되었으며, 이 해에 김옥영(金玉英)과 재혼했습니다. 1987년 9월에 다섯 번째 시집 『가끔은 주목받는 生이고 싶다』가 문학과 지성사에서 출간되었고, 문학선집 『길 밖의 세상』이 나남 출판사에서 출간되었으며, 산문집 『아름다운 것은 지상에 잠시만 머문다』가 문학사상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

1988년에 차남 오원우가 태어났고, 1989년에는 제2회 연암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 같은 해에 수상작품집 『하늘 아래의 생』이 문학과 비평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 1990년 9월에는 독창적인 시 창작 이론서인 『현대시작법』이 문학과 지성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 『현대시작법』은 지금까지도 굉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이론서입니다.

1991년 4월에 여섯 번째 시집 『사랑의 감옥』이 문학과 지성사에서 출간되었고, 만성 폐쇄성폐질환(폐기종)을 진단받아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무릉리에서 요양 생활을 했습니다. 같은 해 11월에 『작가세계』 겨울호에 「은유적 체계와 환유적 체계」라는 '날이미지 시'와 관련된 첫 산문을 발표했고, 시선집 『이 시대의 죽음 또는 우화』가 미래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 1992년에 산문집 『꽃 피는 절망』이 진화 출판사에서 출간되었고, 『책과 인생』에 포토에세이를 연재했으며, 독일에서 개최된 한국문학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날이미지의 시인

1994년, 『현대문학』 8월호 신작특집에 붙인 「살아 있는 것」이라는 시작노트에서 '날이미지'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으며, 1995년 1월에 동시집인 『나무 속의 자동차』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 같은 해 4월에 일곱 번째 시집이자 '날이미지 시론'이라고 하는 독창적인 시론을 바탕으로 한 첫 시집인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가 문학과 지성사에서 출간되었으며 이산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

1996년 8월에 무릉리에서 지냈던 4년간의 시간 동안의 사유가 담긴 산문집 『가슴이 붉은 딱새』가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 요양 장소를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서후리로 옮기게 되었고, 이 때에 폐기능이 약 20% 정도 남은 상태였습니다. 1998년에 시선집 『한 잎의 여자』가 문학과 지성사에서 출간되었고, 1999년 6월에 날이미지 시론의 세계관을 구체화한 시집이자 전체적으로 여덟 번째 시집인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가 문학과 지성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

2002년에 회갑 기념으로 『오규원 시 전집』과 『오규원 깊이 읽기』가 문학과 지성사에서 출판되었고, 건강의 악화로 인해 20년 간 재직한 서울예전 문예창작과 교수직에서 물러났습니다. 2004년에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수상했고, 2005년 6월에 날이미지 시론의 정점인 아홉 번째 시집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와 시론집 『날이미지와 시』가 문학과 지성사에서 출판되었습니다.

사망

2007년 1월 9일, 폐렴으로 인해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였고 같은 달 21일에 마지막 시를 남겼습니다.

한적한 오후다
불타는 오후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

나는 나무 속에서 자본다


— 오규원 시인, 2007년 1월 21일에 남긴 유작 시

2007년 2월 2일 17시 10분 (음력 12월 15일) 에 호흡기 질환인 만성 폐쇄성폐질환(폐기종)과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유해는 2월 5일에 강화도 전등사 경내의 야산에 있는 적송 아래에 안장되었습니다. 수목장으로 치뤄진 그의 장례식에는 가족과 친지를 포함해서, 소설가 신경숙양선희, 장석남, 함민복 등의 시인들이 참석했고 사회는 그의 제자인 이창기 시인이 맡았습니다.

저작

시집

산문집

창작 이론